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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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黄河文明 / Yellow River civilization

중국 황하 중·하류 유역의 황토 지대에서 발달한 세계 4대 문명 중 하나이다. 다만 세계 4대 문명이라는 것은 본래 중국의 근대 사상가인 량치차오가 정의한 개념으로, 서구에서는 "문명의 요람"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1][2][3]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 문명, 인더스 문명은 자연지리적인 장벽이 없었기에 서로 영향을 많이 주고받았지만, 황하 문명은 타클라마칸 사막과 히말라야 산맥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혀 그러지 못했다. 그래서 유라시아의 다른 주요 문명들과는 다소 이질적인 발전 방향을 보였다고 평가받기도 한다.

한편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한 시점이 늦었기 때문에 황하 문명이 다른 주요 문명에 비해 늦게 시작했다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청동기의 사용이 문명의 필수 요소는 아니다. 19세기 유럽의 사학계에서는 한때 그런 기준이 있었지만, 당시 서유럽이 집중적으로 연구하던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 중심 기준이기에 현대 학계에서는 청동기 사용 여부를 엄격하게 적용하지 않는다. 서구에서 4대 문명 대신 사용하는 개념인 '문명의 요람(Cradle of civilization)'에는 아메리카 대륙 문명도 포함되어 있는데, 아메리카 대륙의 문명은 석기 시대에 머물렀음에도 불구하고 속칭 세계 4대 문명과 함께 문명의 요람으로 취급하고 있다.

주로 유물이 발견되는 지역은 황하가 범람원을 형성하는 지금의 산시성, 허난성 부근이다. 황하 문명의 근거가 되는 황하 근방은 홍수가 수시로 일어나 흙탕물이 흘러들어 오는데 이때 농사에 도움이 되는 영양분도 같이 실려오기 때문에 농지가 발달하였고 또한 이러한 범람은 관개와 치수 기술, 건축 기술 및 대형 정치 권력의 출현을 촉진시켰다. 고대 하왕조 전설의 개조인 우임금이 치수를 중시한 것이 고대의 치수 중요성을 설명해준다.

허베이성 등 하류 지방에서도 유물이 꾸준히 발굴되고 있으며, 황하 이외에도 장강 일대나 쓰촨 지역에서도 유적이 발견되고 있기 때문에 중국 문명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려는 추세이다. 현재 중국 학자들은 황화문명보다 빠른 시기 나타난 홍산문명을 주목하고 있는데 홍산문명 요하 유역의 사람들 일부가 기후 등 환경변화로 인해 대량 남쪽으로 이동하여 해당 지역인들을 거의 다 몰아내고 황하 지역에 정착하여 황하문명을 이뤄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홍산문명에서 온 사람들은 다른 언어를 사용했으나 황하지역에서 오랜 시간 지나면서 황하문명이 나타났고 황하지역의 언어를 사용하면서 갑골문자가 나타났다고 한다. 왜냐면 홍산문명 유물이 시간을 지나 장강까지 나타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해외에선 역사 공정으로 평가하고 있다.

대표적인 유물로는 청동기, 귀갑[4]이 있다.
2. 설명[편집]
황하 문명은 선사 시대인 신석기 시대의 페이리강 문화[5], 라오콴타이 유적, 양사오 문화[6] 등을 거쳐 기원전 1600년경 중국 최초의 왕조로 확인된 상나라를 성립시켰다. 또한 역사적 사실 확인은 불가능하지만 중국 고대사에서 존재했다고 주장하는 하 왕조 역시 황하 문명을 칭한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양쯔 강 유역의 지방에도 황하 문명과 병행하여 고대 문명이 형성되어 있었다.

이 시기 이전부터 양잠에 대한 기록이 있었으며, 비단이 생산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황하 유역의 유적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비단 조직은 거의 BC 30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또한 황하에서 시작된 초기 중국 문명은 종이[7], 화약, 나침반 등과 같은 새로운 발명을 통해 전 세계의 발전에 큰 족적을 남겼다.
2.1. 하나라[편집]
기원전 2070? ~ 기원전 1600?

황하의 치수 사업을 맡아 공적을 이룬 우 임금이 순 임금의 신임을 얻어 후계자로 지목되고, 순 임금 사후 즉위한 우 임금이 세웠다고 하는 왕조. 기록상에는 존재하지만 실존했다는 확실한 고고학적 증거도 없는 데다가 전설상의 국가일 뿐이라는 증거가 많다. 문서 참조.
2.2. 상나라[편집]
기원전 1600? ~ 기원전 1046.

'은나라'라고 부르기도 한다. 문서 참조.
2.3. 주나라[편집]
기원전 1046 ~ 기원전 256

황하 문명에서 가장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청동기와 고대 전차 등을 활용하여 각지로 퍼져나가며 토착민과 이민족을 정복하고 흡수하면서 영향권이 급속히 증가하는 시대이기도 하다.
아시아 대륙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아시아는 일반적으로 중국의 신장(新疆) 위구르 자치구와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을 가리킨다. 우리는 이 지역을 ‘투르키스탄(투르크인의 나라)’ 또는 ‘서역西域’이라고 부른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중앙아시아 소장품은 대부분 현재의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발견된 것이다. 이 지역은 타클라마칸사막의 남단과 북단을 지나는 서역남도와 서역북도를 통해 기원전 2세기 무렵부터 인도, 서아시아, 중국 간의 교류가 본격화되었고, 여러 오아시스 도시가 세워져 상업과 종교의 중심지로 번영했다. 중앙아시아실에는 신장 위구르 자치구의 대표적인 석굴사원 벽화와 조각, 서역남도의 로프노르(羅布泊)·누란樓蘭 수집품, 서역북도 아스타나(阿斯塔那) 무덤 출토품 등이 선보인다. 이번 전시는 국제적이고 복합적인 중앙아시아 문화와 미술의 특징을 이해하고, 더불어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교류의 흔적을 살펴볼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갑골문자(甲骨文字)는 기원전 1200년 즈음에 처음 등장한, 중국 대륙에서 발견된 가장 오래된 '체계적인' 문자이자, 한자의 직계조상인 문자이다. 거북이의 등껍질(甲)이나 동물의 뼈(骨)에 새겨졌기에[1] 갑골문(甲骨文)이라고 부른다.[2] 갑골에 군사적인 정벌이나 자연재해, 제례를 지내는 방식과 날짜를 신인 제(帝)에게 아뢰고 기록한, 상나라의 유일무이한 문헌이라고도 할 수 있다. 영어권에서는 갑골문이 제(帝)에게 운명을 묻는 용도로 쓰인 것이 신탁(神託)하는 것에 착안하여 Oracle bone script(신탁 뼈 문자)라고 번역하였다.
2. 용례[편집]
고대 중국에는 거북이 껍데기에 열을 가하여 터진 금을 보고 치는 점술이 있었는데 귀복(龜卜)이라 부른다. 갑골문은 귀복을 친 결과를 기록하려는 목적으로 사용한 문자이다. 물론 일반적인 사건을 기록한 갑골문도 존재하지만 흔하지 않다. 사기(史記) 귀책열전에는 "거북이 껍질을 태워 그 징조를 살폈는데 그 변화가 무궁무진했다."라는 문구가 등장하는데 실제 고고학적 결과와 일치했다.

복사가 새겨진 갑골은 구성이 좌우대칭인데 서로 반대되는 내용을 점친 것이다. 예를 들어 비가 올지 안 올지 점친다고 해보자. 좌측에는 '모 일에 누가 묻습니다. 비가 오겠습니까?'라는 점을 치고, 우측에는 '모 일에 누가 묻습니다. 비가 오지 않겠습니까?'라는 점을 친다. 그리고 점의 결과가 맞은 쪽에 결과를 기록했다. 고고학적으로는 거북이 배딱지(복갑腹甲)나 등딱지(배갑背甲)[3]에 의도적으로 구멍을 뚫고 균열을 낸 모습이 특징적인데, 구멍을 뚫음은 가열했을 때 쉽게 균열되도록 한 조치이다.

갑골문에는 앞서 언급했듯이 거북이 껍질과 짐승 뼈를 이용했다. 거북이는 주로 남방에서 공급되었는데 갑골문에도 남방에서 거북이를 몇 마리 바쳤다는 명문이 자주 발견된다. 짐승 뼈 중에서는 주로 소, 특히 어깨뼈(견갑골)을 주로 사용했다. 이 외에도 사슴 뼈와 뿔, 호랑이의 뼈를 이용하기도 했으며 심지어는 사람의 뼈를 쓰기도 하였다.

갑골에 씌여진 글에는 왕이 직접 그 결과를 판단한 복사가 많이 보인다. 예를 들자면 "갑자일에 점을 쳤다. 왕이 그 결과를 보고 말했다. 사흘 뒤에 비가 내릴 것이다. 삼일 뒤에 비가 내렸다." 하는 형태로, 왕이 점복에 관여한 흔적이 발견되었다. 주로 무정(武丁) 시기 기사가 많은데, 갑골문 해독 결과에 따르면 무정이 거느린 무당이 무려 70여 명이나 되었다.[4]

당시 상나라는 제(帝)라는 신을 상나라의 수호신이자 주신으로 섬기며 하늘과 자연의 뜻을 물었는데, 군사적인 주제로는 강(羌)족과 인방(人方), 주방(周方) 정벌 문제를 자주 제에게 뜻을 물었다. 특히 갑골문 기록상 주방과 갈등이 심각한데, 주방은 훗날 무력혁명으로 상나라를 전복한 그 주나라이다. 갑골문에 주방은 나라를 뜻하는 방(方)과 무리를 뜻하는 족(族)이 혼용되거나 의도적으로 바뀌어 사용된다. 상나라 사람이 주방에 악감정이 있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다.

상나라 이후 천자국이 된 주나라 또한 갑골 문자를 사용했는데, 점을 칠 때 상(商)자를 옷 의(衣)자로 기록하였다. 주나라 사람들 또한 상나라를 비하한 듯하다. 衣의 발음은 '은'으로 추정된다. 또는 상나라의 수도 은(殷)[5]을 비하한 것일 수도 있다.
하나라와 은나라는 대나무 가지나 거북이 껍질을 사용해 점을 쳤다. 점을 치고 나면 이를 모두 버렸다. 한번 점을 친 것은 보관해봐야 영험이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나라에서는 점치는 직책인 복관(卜官)이 이를 소중히 여겨 보관했다.
사기 귀책열전

참고로 사기에 따르면 점을 치고 버렸다고 언급했으나, 고고학적으로 갑골문은 층층이 아래서부터 겹친 상태로 발견되었는데, 이는 상나라 사람들이 특정한 장소에 따로 보관했다는 증거이다. 갑골문을 소홀히 여겼다면 따로 발견되어야 하므로 현 학계에서는 귀책열전의 내용이 오류라고 본다.[6] 한 장소에 모아서 버렸다고 할 수도 있지 않나?[7] 성산패총?
3. 발견사[편집]
주로 중국의 은허(殷墟) 지역에서 파편 형태로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명나라 말기에 은허 지역은 농촌이었다. 종종 밭을 개간하던 농민들의 의해 상나라의 유물인 청동 기물이나 갑골문으로 추정되는 거북이 껍질이 발견되었는데, 청동기는 시장에 매물로 팔렸으나 갑골문은 뼈라서 귀해 보이지 않아 매물 신세를 면한 것으로 추정된다. 갑골문들은 한데 모아서 한군데에 묻었다고 전한다.

청나라 광서제 말년에 중국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小屯村)의 농민들이 밭을 갈다가 갑골문을 발견하게 되었다. 그러나 학식이 부족한 농민들은 갑골문을 고대 문자라고 생각하지 못하고 그저 문양이 새겨진 뼈라고 여겼다. 뼈는 농사에 전혀 쓸모없는 물건이었기에 농민들은 갑골문을 한약방에 팔아버렸다. 이렇게 갑골문은 용골이라는 약재로 취급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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