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열패밀리, 정유경, 합스부르크, 로트링겐,마리아테레지아,오스트리아,카를6세,후계자,프로이센,작센, 요제프,헝가리귀족,레오폴트2세,바이에른,부르봉가, 아말리아,보수주의자,영국,동맹

1 year ago

들어가는 글: 유럽을 만든 통치 가문의 유서 깊은 이야기

1장 합스부르크: 가장 오래된 제왕의 가문
가문의 시작과 성장: 대공위시대에 제국을 통치하다|치열한 상속 다툼이 벌어지다|알브레히트 계열 vs 레오폴트 계열
유럽의 중심을 차지하다: 황제 프리드리히 3세와 가문의 황위 계승|카를 5세의 통치와 한계
두 개의 합스부르크: 에스파냐-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국제전으로 치닫는 전쟁의 시대|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황혼: 프랑스 대혁명과 합스부르크의 위기|제국의 마지막 장면
* episode 1ㆍ합스부르크 가문은 왜 근친결혼을 하게 되었을까?

2장 부르봉: 프랑스 왕가의 전성기
카페 가문의 탄생: 교회가 인정한 정통 가문이라는 명분|루이 9세의 통치와 십자군 전쟁 이후
발루아 가문의 등장: 카페 직계 가문의 단절과 살리카법|카페 가문의 분가들|암살, 내전, 협상의 대혼란|앙주 공작과 부르고뉴 공작
프랑스 왕위를 계승한 부르봉 가문: 프랑스 왕위를 얻기 전의 부르봉 가문|앙리 4세의 즉위부터 프랑스 대혁명까지|혁명 이후 왕위를 얻은 오를레앙 가문
에스파냐를 지배하다: 에스파냐의 왕위 계승|파르마와 양시칠리아
* episode 2ㆍ프랑스의 왕위 계승 요구자들

6장 비텔스바흐: 치열한 분할 상속의 계보
비텔스바흐 가문과 두 개의 분가: 초기의 비텔스바흐 가문
팔츠 가문: 라인팔츠의 분가|란스후트의 상속을 둘러싼 갈등|팔츠-지메른 가문의 형성|팔츠-츠바이브뤼켄 가문의 상속 |팔츠-노이부르크와 팔츠-줄츠바흐
바이에른 가문: 바이에른 공작령의 분할과 갈등|바이에른 공작 가문의 분가들|우호적인 관계였던 바이에른과 합스부르크
바이에른 왕국: 두 개의 선제후령|급격한 변화를 맞이한 바이에른 왕국
30년 전쟁이 끝나고 나서 합스부르크 가문은 위기를 겪게 됩니다. 바로 후계자 문제 때문이었습니다. 에스파냐-합스부르크 가문은 후계자가 될 아들이 점차 줄어들었으며 특히 카를로스 2세는 후계자를 얻지 못할 것이 분명했습니다. 이렇게 되자 에스파냐 상속을 두고 분쟁이 일어났습니다. 카를로스 2세의 누나인 마리아 테레사는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와 결혼했으며, 카를로스 2세의 다른 누나인 마르가리타 테레사는 외삼촌인 황제 레오폴트 1세와 결혼했습니다. 원래 마리아 테레사는 결혼할 때 지참금을 받고 왕위 계승 권리를 포기했어야 하지만 에스파냐는 프랑스에 이 지참금을 다 지급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빌미로 루이 14세는 아내의 권리를 통해 자신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왕위를 얻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_ 52~53쪽, 〈1장 합스부르크: 가장 오래된 제왕의 가문〉 중에서

루이 14세 생전에 에스파냐 왕위 계승 문제가 발생합니다. 루이 14세의 어머니와 아내는 모두 에스파냐의 공주였습니다. 합스부르크 가문에서는 라이벌인 프랑스 왕가에 에스파냐를 넘겨줄 수 없었기에 상속 권리를 포기하고 대신 많은 지참금을 부여했습니다. 하지만 에스파냐에서는 마리 테레즈의 지참금을 덜 줬고, 루이 14세는 이것을 빌미로 자신의 손자인 앙주 공작 필리프가 에스파냐 왕위를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결국 이로 인해 에스파냐 계승 전쟁이 일어났으며 복잡한 과정을 거쳐서 앙주 공작 필리프는 에스파냐의 국왕 펠리페 5세가 되었습니다. 이후 에스파냐 왕위는 이 펠리페 5세의 후손들이 이어나가게 됩니다. _ 102쪽, 〈2장 부르봉: 프랑스 왕가의 전성기〉 중에서

표트르 대제는 이렇게 러시아를 개혁하면서 유럽에서 러시아를 강국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평생 후계자 문제로 골머리를 앓게 됩니다. 그는 첫 번째 아내인 에우도키야 표도로브나 루프키나와 결혼해 아들 알렉세이 페트로비치를 낳았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아내와 사이가 매우 나빴고 결국 표트르 대제는 그녀와 강제로 이혼해버립니다. 이혼한 후 에우도키야는 수녀원으로 들어가 표트르 대제의 개혁을 거부하는 이들의 지지를 받고 중심인물이 됩니다. 이런 상황은 표르트 대제의 유일한 적자였던 알렉세이에게 영향을 미쳤고, 어머니를 동정한 알렉세이 역시 반개혁적인 성향을 가지게 됩니다. 표트르 대제는 반개혁적 성향을 가진 아들을 정적으로 여겼을 것이며 아들을 경계하게 되었습니다. _ 149~150쪽, 〈3장 로마노프: 강력한 러시아를 만든 힘〉 중에서

하노버 가문 출신의 마지막 국왕은 바로 빅토리아 여왕이었습니다. 영국 왕가에서는 빅토리아 여왕이 친가 쪽 사촌과 결혼해 하노버 가문에서 계속해서 영국의 왕위를 이어가길 원했습니다. 하지만 빅토리아 여왕은 외가 쪽 사촌이었던 작센-코부르크-고타의 앨버트와 결혼했습니다. 빅토리아 여왕 시기 영국은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산업혁명을 통해서 산업과 경제에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으며, 팽창주의를 채택한 결과 여러 지역의 식민지를 경영했습니다. 특히 인도를 장악한 빅토리아 여왕은 1876년에 인도의 여제가 되었고, 이후 빅토리아 여왕을 여왕-여제라고 칭하기도 했습니다. _ 262~263쪽, 〈5장 하노버: 영국의 전성기를 이끈 가문〉 중에서

나폴레옹에 의해 각 나라들이 재편될 때 작센 역시 ‘왕국’이 되었고,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3세는 작센의 국왕 프리드리히 아우구스트 1세가 됩니다. 그는 폴란드 지역 역시 바르샤바 공작 형태로 통치했습니다. 그는 끝까지 나폴레옹의 동맹으로 남은 유일한 독일 제후였으며, 이는 빈 회의 때 작센 왕국의 지위에 문제가 됩니다. 하지만 구체제를 유지하는 것이 목적이었기에 작센은 국토의 상당 부분을 프로이센에게 빼앗기긴 했지만 여전히 수도인 드레스덴을 중심으로 하는 영지를 남겼으며 왕국의 명맥도 이어나가게 됩니다. _ 407쪽, 〈8장 베틴: 작센 중심의 통치 가문〉 중에서

접기
출판사 서평
뿌리 깊은 가문의 역사는 곧 유럽의 역사가 되었다
유럽에서 가문이 세력을 확장하고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은 ‘결혼’과 ‘후계자’였다. 예를 들면 12세기 잉글랜드의 왕 헨리 2세의 어머니인 마틸다는 헨리 1세의 딸이었고, 아버지로부터 왕위 계승 권리를 물려받았다. 앙주 백작이었던 헨리 2세는 어머니의 권리를 이어받아 잉글랜드 왕위 계승을 주장했고, 결국 잉글랜드를 통치할 수 있었다. 이처럼 유럽의 통치 가문에서 후계자가 바닥날 때는 항상 혈연관계를 통해 후계자가 될 사람을 찾았다. 이때 누가 더 이전 국왕과 가까운 친척인지가 그 지역의 통치 권리를 이어받는 데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친척조차 없다면 해당 가문은 단절되었고, 혈연관계에 맞는 다른 가문의 인물이 그 가문의 영지를 상속받았다. 유럽의 수많은 역사소설이 ‘후계자 문제’를 주제로 삼은 것은 바로 이런 연유 때문이다.
14~15세기 프랑스와 잉글랜드 사이에서 벌어진 백년전쟁도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에 대한 권리를 두고 다툰 것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왕이었던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공주였던 어머니의 권리를 통해 자신이 프랑스 왕위에 올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프랑스 내 영주들은 그가 아닌 발루아 백작 필리프를 국왕 필리프 6세로 받아들였고, 이 일로 잉글랜드와 프랑스는 백년전쟁을 시작하게 되었다. 에드워드 3세는 프랑스 내 잉글랜드 국왕의 영지를 프랑스 국왕의 봉토가 아닌 독립적인 영지로 만들길 원했으나 프랑스는 이를 수용할 수 없었기에 전쟁을 피할 수 없었다.

20세기 이후까지 유럽을 지배한 가문들의 스펙터클 연대기
유럽의 로열 패밀리 중에 가장 널리 알려진 가문은 역시 ‘합스부르크’일 것이다. ‘영원한 제왕의 가문’이라 불리는 합스부르크는 유럽에서 가장 오래된 통치 가문이자 다양한 분야에 영향을 미쳤다. 합스부르크는 신성로마제국의 왕가이자 프랑스를 제외한 서유럽 대부분의 지역을 통치 영지로 가지고 있었기에 정치적으로 큰 힘이 있었고, 특히 건축이나 미술 등 예술 분야를 적극 후원해 유럽의 문화를 부흥시켰다. 그러나 합스부르크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나폴레옹과 전쟁을 치르면서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된다. 가문의 이익을 위해 근친결혼을 추진하면서 세력을 확장하고 강력한 권력을 회복하고자 힘썼지만, 결국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제국이 붕괴되면서 마지막을 맞이했다.
오늘날 스칸디나비아 3국이라 불리는 덴마크, 스웨덴, 노르웨이를 비롯해 그리스, 러시아까지 광범위한 지역을 통치한 올덴부르크 가문의 이야기도 흥미롭다. 유럽의 북서부에 위치한 올덴부르크 백작 크리스티안 1세가 덴마크의 왕이 되면서 시작된 이 가문은 이후 슐레스비히-홀슈타인 공작령을 얻으면서 북유럽에서 중요한 가문으로 자리 잡았다. 18세기에 ‘유럽의 할아버지’라는 별칭을 얻은 크리스티안 9세는 여섯 명의 자녀를 여러 왕가와 결혼시키며 세력을 확장했고, 그의 후손들은 덴마크, 노르웨이, 그리스 등을 통치했다. 놀랍게도 그의 마지막 후손은 현재까지 살아 있으며, 그리스에 거주 중이다.

특별한 인물들의 삶에서 읽어낸 장대한 역사
비록 정치적인 목적으로 이용되었으나, ‘여제’의 자리에 등극한 여성 후계자 이야기도 이 책에서 주목할 만한 부분이다. 로마노프 가문에서는 러시아를 강력한 제국으로 만든 표트르 대제 이후 후계자가 없자 그의 아내였던 예카테리나 1세가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2년의 통치 후 사망하고, 아들 표트르 2세마저 15세의 나이로 사망하자 귀족들은 표트르 대제의 조카 안나를 황제로 앉혔다. 이후 안나의 아들 이반 6세의 섭정을 추진하다가 표트르 대제의 딸 옐리자베타가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스스로 러시아 황제가 되었다.
영광과 쇠락의 순간을 동시에 맞이한 인물도 있다. 독일제국의 마지막 왕위에 오른 빌헬름 2세다.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배하자 퇴위한 빌헬름 2세는 네덜란드에서 망명 생활을 했고, 독일에서 군주제로 복귀할 날을 기다리며 나치와 거리를 두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사망한 그는 나치의 상징이 될 것이 두려워 독일이 아닌 망명지인 도른에 묻혔다.
저자의 말처럼 “역사란 다양한 사람들의 삶이 모여서 이루어지는 것”이며, 선대에서 후대로 이어지는 인물들의 세세한 이야기가 모여 거대한 유럽의 역사를 만들어 냈다. 꼬리에 꼬리를 무는 로열 패밀리의 장대한 계보를 통해 우리가 알고 있는 유럽사 뒤편에 숨은 흥미로운 이야기를 찾아낼 수 있을 것이다.

Loadin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