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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years ago

#문학기행
중국에서 유학중인 송윤선 저자가 색다른 방식으로 중국을 알리기 위해 직접 보고 느낀 중국 문학을 여행에 접목시킨 에세이다『베이징 문학 여행기』. 이 책에는 중국 대학의 양대 산맥을 책임지고 있는 칭화대와 북경대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저자소개
저자 : 송윤선
목차
머리말

중국 현대문학의 거장, 루쉰 - 루쉰 옛집(?迅故居)
루쉰의 서당 - 삼미서옥서점(三味?屋?店)
중국 신시(新?)의 대표작 《여신》의 탄생지 - 꿔모뤄 옛집(郭沫?故居)
중국의 노벨 문학상, 마오뚠 문학상의 시초 -마오뚠 옛집(茅盾故居)
송나라의 애국 시인 충절을 읊다 -문천상사(文天祥祠)
인민예술가의 비극 - 라오서 옛집(老舍故居)
라오서의 찻집 - 라오서 찻집(老舍茶?)
북경 서민들의 삶의 터전 - 사합원(四合院)
나도 이제 《홍루몽》의 주인공이다! - 북경대관원(北京大??)
북경에서 중국 각지를 돌아보는 방법 -도연정공원(陶然亭公?)
중국의 아픈 역사를 되짚으며 - 노구교(???)
달빛을 품은 연못 - 칭화대학교(??大?)
겨울에도 빛나는 식물원 - 북경식물원(北京植物?)
중국 문학의 명문 - 북경대학교(北京大?)
고전과 설화가 있는 길고 긴 회랑 -이화원(?和?)
형식 파괴를 통해 새로운 문학의 시대를 열다 -현대문학관(?代文??)

맺는말
홍루몽 인물 관계도
북경 지도
출판사 서평
송윤선 저자의 ‘유학생이 쓴 살아 숨 쉬는 베이징 문학 여행기’에는 내로라하는 중국의 문인들과 작품들에 대해 상당 부분 수록되어 있다. 루쉰부터 시작하여 꿔모러, 문천상사, 라오서 등 문인들의 이야기와 더불어 북경 사람들의 삶의 터전이라 할 수 있는 사합원과 홍루몽을 그대로 옮겨 놓은 북경대관원, 중국의 아픈 역사를 고스란히 담고 있는 노구교, 중국의 고전과 설화가 살아 움직이는 이화원과 현대문학관까지 아우르고 있다. 중국 대학의 양대 산맥을 책임지고 있는 칭화대와 북경대에 대한 이야기도 생생하게 담겨 있다.
궈모뤄(중국어: 郭沫若, 병음: Guō Mòruò, 한자음: 곽말약, 1892년 11월 16일 쓰촨성 러산 시 ~ 1978년 6월 12일 베이징 시)는 중국의 신문학 활동가, 극작가,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가, 마오쩌둥주의 문학 사상 공작자이다. 본명은 카이전(開貞), 호는 딩탕(鼎堂)이며, 모뤄(沫若)는 자이다.
저장성 사오싱시의 관료 집안에서 태어났다. 할아버지가 중앙정부의 내각중서(內閣中書)였기에 유년기는 비교적 유복하게 지냈다. 유년기 이름은 아장(阿長)이었고, 학명은 장수(樟壽), 자는 예산(豫山)이다. Revolution이란 뜻의 '루쉰'이라는 필명을 신청년에서 1918년 처음 사용하였고 잡지 발간과 대학생 교육을 통해서 리다자오와 천두슈, 취추바이 등의 공산주의 혁명 활동에 적극 참여한 대학 교사이기도 했다.

17세 때는 난징의 강남수사학당(江南水師學堂)이라는 군대학교에 들어갔고, 서방식 설비와 과목을 갖춘 광무철로학당(磺務鐵路學堂)에서 학업을 했고, 보수파 교육자 옌푸가 토머스 헨리 헉슬리의 〈진화와 윤리〉중 일부를 번역한〈천연론〉(天演論)을 접하면서 사회적 진화와 같은 근대 사상을 접하기도 했으나, 천두슈, 리다자오 등과 새청년의 참여를 통해서 마르크스-레닌주의 역시 일찍 접하였으며 보수파 옌푸와는 다른 길을 걸으며 중국 인민이 중국 공산당 지도자들과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길을 펴기 위한 계급적 투쟁에 나서게 하는 중국을 만들기 위한 혁명 소설과 경제적 투쟁의 노정에 나서는 한편, 좌익 작가 연맹과 민권 동맹 등을 통해서 중국 공산당의 마르크스-레닌주의 혁명을 지원하였다.

광무철로학당 졸업 후 22세 때 청나라의 유학생 자격으로 일본으로 유학, 고분학원(弘文學院)에 입학해 일본어와 과학 기초지식을 배운 뒤 1904년 9월부터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1] 에서 수학하기도 하였다. 이 무렵부터 한족 혁명파에 가담해 활동하기도 하였다. 루쉰은 일본 유학 2학년 때 환등기를 이용해 수업하던 세균 수업에서 수업중 보여주던 시사 자료 가운데 러일전쟁에서 러시아의 간첩 노릇을 하다 일본군에게 잡힌 몇몇 중국인이 처형당하는 장면과 이에 분개하지 않던 이들의 모습을 보고 소설을 짓기로 결심하고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를 자퇴했다고 글을 적기도 하였다.(《눌함》 자서) 이 자서는 코민테른 활동을 하고 있던 리다자오, 천두슈, 취추바이 등이 애국 활동을 하는 것으로 보이게도 만들었으며 1922년 말에 쓰여진 것이다.

당시 일본의 관립학교에서 중국인 유학생의 입학은 청나라 공사(公使)의 추천서를 통해 이루어졌고(중학 이상의 학력 조건이 붙었다), 시험 없이 입학한 루쉰이었지만 당시 의학전문학교에서 일본인 학생들조차 졸업시험까지 가는 경우는 입학자 100명에 졸업 응시자 50명꼴로 드물었으며 루쉰처럼 1년 7개월 만에 중도에 탈락하는 경우도 많았다. 입학한 첫 해 시험에서 루쉰은 백 명 가운데 중간 정도의 성적으로 60점 정도의 성적을 거두었으며, 그는 400엔이라는, 당시 중학교 교사의 수입을 넘는 거액 장학금을 일본 정부로부터 받았다. 그는 2학년에 올라간 뒤는 기말 시험 성적에 대해 일본인 동기생들에게서 억울하게도 '시험 문제 유출이 있었다'고 의심을 당한 일도 있었으며, 입학 첫 해부터 담임을 맡아줬던 해부학 후지노 겐쿠로(藤野嚴九郎) 교수가 호의로 중국 유학생 루쉰의 노트에 첨삭을 해줬던 점이 다른 학생들에게서 그런 의심을 받은 원인이기도 했다. 루쉰이 일본에서 학생들에게 차별 감정을 받던 차에도 중도에 학업을 포기하려는 생각을 하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1906년 3월에 센다이 의학 전문학교 퇴학하고 도쿄 생활을 시작하지만, 소설 창작은 미뤄둔 상태였다. 청나라로 돌아간 루쉰은 세 살 연상의 주안(朱安)이라는 여성과 봉건식 혼례를 올렸으나 2주 후 아우인 저우쭤런과 함께 다시 일본에 돌아갔고, 그 곳에서 발간에 노력했던 잡지 「신생(新生)」은 여러 사정으로 무산되었으나, 「하남(河南)」이라는 잡지에 2년 간 '파악성론(破惡聲論)', '문화편지론(文化偏至論)', '마라시역설(魔羅詩力說)' 등 문장을 썼고, 동부 유럽 여러 나라의 단편번역집 《역외소설집(域外小說集)》을 저우와 공역해 출판하기도 했다.

1909년 귀국하여 향리에서 교원으로 외국 소설 번역과 중국 고전을 연구하기도 했다. 항저우와 샤오싱 등을 거쳐, 1912년에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이에 기대를 갖고 중화민국 임시정부의 교육부 하급관리로서 참가하기도 했다. 그러나 쑨원이 위안스카이에게 권력을 양보함과 동시에 정부가 난징에서 베이징으로 이전하면서 함께 옮겨갔다. 그러나 베이징에서 사는 현실에 실망하는 한편, 위안스카이 정부에 대한 반동도 있어 잠시 침묵의 생활을 보냈다. 문학혁명이 개시되자 잡다한 감각(雜感)을 쏟아내는 현실 비평에 나서는 한편, 유교와 중국에 대한 통절한 자기 부정, 중공의 혁명 정신을 제창하게 된 '광인일기'를 1918년에 리다자오, 천두슈 등과 긴밀히 협력했던 잡지 신청년에 내놓은 것이 중국 근대문학사와 중국 신민주주의 혁명사에서 중요하게 언급된다(이것은 1911년 시작된 문학 개혁의 흐름 상에서 신청년과 루쉰 등에 의해서 특정한 방향으로의 중공 문학의 성격이 형성된 것을 말한다).

이후 '루쉰' 및 다른 사람들이 모르는 120여 개가 넘는 아주 많은 다른 필명을 사용하면서 혁명 지도 활동에 나서게 된다. '미명사'(未名社), '어사사'(語絲社) 등에 의한 활동을 펴는 한편 베이징 대학 등에서 대학생들을 가르치면서는 중국 공산당의 혁명 문예 인력들을 양성하기도 하였다. 이밖에 '중국소설사략(中國小說史略)'은 고대 중국의 신화, 전설에서 청말까지의 중국 소설사를 논한 저술이었다.

담배 피우는 루쉰(1936)

루쉰의 무덤(상하이)

루쉰 공원(한국의 독립운동가 윤봉길이 대한민국의 해방과 광복을 위하여 의거를 치렀던 상하이 훙커우 공원이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 건립과 마오쩌둥의 대장정을 지원한 공산 혁명 작가 루쉰의 이름을 붙여서 1956년부터 마오둔과 마오쩌둥 등에 의해서 루쉰 공원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루쉰 동상
이후로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아큐정전」이라는 소설을 리다자오가 편집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던 신보부간에 내놓았다.

루쉰은 어느 날 새청년의 편집진 중 하나이자 문화혁명가였던 첸쉬안퉁(錢玄同), 즉 진신이(金心異)에게 아래와 같은 말을 했다고 글을 지었다.

가령 철로 밀폐된 방이 있다고 하세. 창문이 하나도 없고, 절대로 부술 수도 없는 방이야. 그 속에 많은 사람들이 쿨쿨쿨 잠들어 있지. 그러니 오래 지나지 않아 모두 다 숨막혀 죽어버릴 걸세. 그러나 그들은 혼수상태에서 그대로 죽음으로 직결가는 거니까 죽음의 비애도 느끼지 못할 거야. 그런데 네가 지금 큰 소리를 쳐서, 다소 의식이 뚜렷한 몇 사람들을 깨우면, 그들 불행한 사람들에게 도저히 구원의 길이 없는 임종의 맛을 느끼게 하는 것이 되는데, 그래도 너는 그들에게 못할 짓을 저지른 꼴이라고 생각되지 않겠는가?
진신이는 이에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루쉰은 적었다. "그러나 이미 눈뜬 사람이 몇이라도 있다면 그 철로 된 방을 때려 부수어버릴 희망이 전혀 완전히 없다고는 할 수 없는 것 아닐까요?" 루쉰은 이러한 말의 영향을 받아 그의 새청년에서의 첫 단편 소설 『광인일기』를 썼다고 소설의 서문에서 썼다.(『납함』 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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