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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목차
일러두기
약어 풀이
옮긴이의 말
소개의 말
계획

제1부 복음서들과 역사
제1장 예수와 역사 문제
1. 주석학과 역사
2. 복음과 역사
3. 역사는 어떻게 하는 것인가
제2장 공간과 시간 안에서
1. 한 생애와 한 죽음의 시간
2. 여정과 그 장소들
제2부 예수와 유다교
제3장 예수와 침례 운동
1. 기원후 1세기의 침례 운동의 현상
2. 세정례와 정화욕
3. 침례 운동
4. 요한 세례자와 예수
제4장 예수, 성전 그리고 율법
1. 예수는 바리사이 경향의 율법 학자였는가
2. 성전 문제
3. 예수와 율법
제3부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 그리고 사람의 아들
제5장 예언자 예수
1. 엇갈리는 그리스도교 전승
2. 메시아사상과 예언자 사상
3. 새 시대의 예언자들
4. 예언자 예수
5. 예수는 종말론적 예언자인가
제6장 하느님 나라의 표징들
1. 복음서에 나오는 기적의 문제
2. 예수의 기적들을 회상하는 그리스도교
3. 하느님 나라의 예언자
제7장 사람의 아들
1. 방법론과 학계의 견해들
2. 그리스도교 공동체와 사람의 아들
3. 팔레스티나 본토와 사람의 아들
4. 사람의 아들과 예수
제8장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1. 유다교와 그리스도교 첫 공동체에서의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표현
2. 예수와 하느님 아버지
제4부 그리스도교적 역사의 탄생
제9장 빵, 말씀 그리고 역사
1. 주님의 만찬
2. 식사와 말씀
3. 말씀과 역사
부록
각 장의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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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이와 같이 예수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결국 대부분 그리스도교 계통의 문헌들에 의존하는 도리밖에 없다. 그런데 이 문헌들이 파스카 신앙에 잔뜩 물들어 있다는 데에 문제가 있다. 물론 이 문제는 이미 잘 알려져 있는 터다. 우리는 어떻게 하면 골고타의 사건 이전의 나자렛 예수를 알아볼 수 있을까? 신약 성경이라고 하는 문헌은 믿는 이들의 첫 공동체들이 만들어 낸 것이다. 그 목적도 주로 이들 공동체에 이바지하자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면 파스카 이전의 예수를 정확하게 그려 주는 상을 제공받을 수 있는가?
- ‘제1장 예수와 역사 문제’ 중에서

그리스도교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침례 운동 또는 세례 운동이다. 예수가 요한 세례자로부터 세례를 받았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 훗날 그리스도인들은 세례를 집전할 뿐 아니라 할례 대신 이 세례를 새로운 계약의 하느님의 백성에 가입시키는 입교 의식으로 삼게 된다. 예수와 요한 세례자를 이어 주는 유대는 이렇게 당연한 것으로 요청된다. 예수의 활동은 요한 세례자의 발자취를 따라 전개된 것이다. 그런데 한 가지 놀라운 사실은 바오로 사도가 요한 세례자에 관해서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적어도 바오로의 친서들에서는 하지 않는다. 복음사가들은 요한 세례자에 관한 기사를 보도하고 있는데, 그와 그의 활동을 예수에게 종속시켜 소개하려는 세심한 배려를 잊지 않는다. 공관 복음사가들은 예수가 침례 운동을 했다는 말을 전혀 하지 않지만, 요한 복음사가는 예수가 “유다 땅으로 가시어 …… 세례를 주셨다.”(요한 3,22)라고 말한다. 거기서 좀 더 읽어 내려가면 요한 세례자의 제자들이 스승에게 이렇게 말한다. “스승님, 요르단 강 건너편에서 스승님과 함께 계시던 분, 스승님께서 증언하신 분, 바로 그분이 세례를 주시는데 사람들이 모두 그분께 가고 있습니다.”(요한 3,26) 복음사가는 곧이어 이 말의 내용을 좀 더 자상하게 밝혀 준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요한보다 더 많은 사람을 제자로 만들고 세례를 준다는 소문을 바리사이들이 들었다는 것을 알게 되셨다.”(요한 4,1) 그리고 그다음 절에서는 여기에 쐐기를 박는다. “사실은 예수님께서 친히 세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제자들이 준 것이다.”(요한 4,2) 이와 같이 원시 그리스도교의 전승은 요한 세례자와 예수를 밀접하게 연결하면서도 이 두 사람을 갈라놓는 간격을 분명하게 역설하고 있다. 역사가가 해야 할 일 중 하나가 바로 이 간격을 제대로 측정하는 일이다.
- ‘제3장 예수와 침례 운동’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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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예수 운동의 기원과 그 전개’를 평생 연구한 세계적인 성경 학자 샤를르 페로 신부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명확하게 밝힌 진실!

세계적인 성경 학자이자 기원후 1세기의 유다교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샤를르 페로 신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유다교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파악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의 그리스도’입니다. 즉 믿는 이들의 첫 공동체가 만들어 낸 신약 성경 안에서 만나는 분입니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신앙의 그리스도’가 아닌 ‘역사의 예수’를 탐구하고자 합니다. 엄격한 의미의 역사적인 접근, 즉 파스카 신앙에 물들지 않은 골고타 사건 이전의 나자렛 예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 것입니다. 이 책을 통해 우리는 예수가 살았던 당시의 유다교라는 종교적이며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비추어 인간적인 예수의 참모습을 만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예수, 과연 그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합니다.

‘예수 운동의 기원과 그 전개’를 평생 연구한 세계적인 성경 학자 샤를르 페로 신부가 ‘역사적 예수’에 대해 명확하게 밝힌 진실!
세계적인 성경 학자이자 기원후 1세기의 유다교에 관한 저술로 유명한 샤를르 페로 신부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물을 유다교라는 구체적인 맥락 안에서 파악하고 있다. 우리가 아는 예수 그리스도는 ‘신앙의 그리스도’이다. 즉 믿는 이들의 첫 공동체가 만들어 낸 신약 성경 안에서 만나는 분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 책에서 ‘신앙의 그리스도’가 아닌 ‘역사의 예수’를 탐구하고자 한다. 엄격한 의미의 역사적인 접근, 즉 파스카 신앙에 물들지 않은 골고타 사건 이전의 나자렛 예수에 대해 알아보고자 한 것이다. 그래서 이 책은 예수가 살았던 당시의 유다교라는 종교적이며 윤리적이고 문화적인 배경에 비추어 인간적인 예수의 참모습을 만나게 할 뿐만 아니라,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에게 ‘예수, 과연 그분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지금까지 우리는 파스카 사건에 입각하여 구성된 복음서의 증언을 충분히 감안하면서 예수를 침례자, 예언자, 악마 추방자 그리고 이적 행위자로서의 그의 활동에 비추어 역사적으로 파악해 보려 했다. 여기에 사용된 방법과 절차 때문에도 우리는 예수라는 인물을 심리적으로 이해해 볼 기회도 없었고, 때에 따라서는 개개의 사건들을 그 나름대로의 특성에 따라 파악해 볼 기회도 없었다. 그래서 가령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들에 우리의 관심을 쏟을 겨를이 없었다. 이런 말씀은 과연 예수가 몸소 발설하였는가? 저런 기적은 과연 전해 오는 이야기대로 사실상 일어났는가? 이런 질문들은 통시적 방법을 사용하는 문헌 비판에서 가장 고도의 ‘문학적’인 신임을 부여하는 예수의 말씀들과 동작들에 대해서도 똑같이 제기할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뭐니 뭐니 해도 현재 성경학계에서 가장 논란이 심한 질문 중의 하나인 ‘사람의 아들’의 문제를 다루려 들 때 우리는 정말 헤쳐 나올 길 없는 막다른 골목으로 쫓겨 들어가는 것은 아닐까? 예수는 참으로 자기 당대 사람들에게 자신을 사람의 아들로 제시하였는지에 대한 질문이 바로 그것이다. 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에서 예수가 정확하게 무엇을 알아들었는지를 파악하려 들 때 우리는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예수의 자의식이라고 하는 금지 구역으로 침범해 들어온 것은 아닌가? 예수는 과연 이 신비스러운 낱말에다가 무슨 의미를 부여하였을까? 이런 식으로 질문을 제기한다는 것 자체부터가 타당한 것이 될 수 없다면 결국 우리는 이 사람의 아들 문제에서 역사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과연 있는 것일까? 이와 같은 일련의 질문에 대한 우리의 답변은 지금까지의 장들에서 밟아 온 노선과 크게 다를 것이 없을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출발점은 파스카 이후의 공동체들이다. 필자는 이들이 사람의 아들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면서 예수를 회상하는 동안 그분을 어떻게 역사적으로 겨냥하려 했는지를 살펴 나갈 것이다. ‘그리스도’라든가 ‘하느님의 아들’이라는 칭호는 이 공동체들의 신앙 고백의 일부를 이루고 있었다.
- ‘제7장 사람의 아들’ 중에서

필자는 이 연구를 마치기 전에 교회적인 의미에서 역사를 쓴다는 것의 특성이 무엇인지를 다소나마 이 자리에 밝혀 두고 싶다. 물론 우리는 예수와 역사에 관한 이제까지의 우리의 담론을 앞으로도 계속해서 길게 연장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아직도 궁금한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그중에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위해서 가장 기본적인 것도 있다. 실상 우리는 주님의 죽음과 부활의 이야기에 대해서 우리의 주의를 기울일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 밖의 다른 점들도 좀 더 착실하게 발전시키고 때로는 수정도 하고 신축성 있게 조정도 해야 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역사가의 처지에서 과거를 재진술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는, 다른 모든 학문이 그렇듯이 어디까지나 가설의 언어다. 어느 정도의 일관성을 찾아 나서서 그 시야를 언제나 좀 더 포괄적으로 넓히다 보면 역사가의 진술은 끊임없이 여러 가지 어려움에 부딪치게 마련이다. 특히 신약 성경의 주석자로 말하면 역사를 하지 않는 편이 오히려 더욱 쉬울 것이다. 그 이유를 우리는 이미 이 책의 첫 장에서 밝힌 바 있다. 거기에 이어 온 다른 장들은 예수에 관해서 역사적으로 책임 있게 말하기가 얼마나 어려운지를 여러 가지 예를 통해서 잘 보여 주었다. 그렇지만 예수를 역사적으로 알아보려는 우리의 기도企圖는 여전히 가능하다. 다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다. 우리가 이미 말한 바 있는 한계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일이다. 이 한계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것은 이것이다. 곧 ‘나조라’ 사람 예수의 엇갈리는 여러 가지 모습들은 역사가의 손에 좀처럼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의 경우 그에 관해서 아무리 우리가 진술을 지어낸다 하여도 거기에는 언제나 진술 이상의 그 무엇이 있다. 복음서의 독자는 어쩌면 이 근본적인 차이를 확인하고 우리 인간의 말을 모조리 소진한 다음에야 비로소 교회의 신앙의 지지를 받아 자기의 스승을 역사적으로 지칭하고, 자기 나름대로 예수는 주님이시라고 더듬더듬 고백할 수 있게 된다고 하겠다.
- ‘제9장 빵, 말씀 그리고 역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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