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죽회, 이을설이 패전하고 철수하는 날 김재규를 처형하다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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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재규를 의인이다 유신의 심장을 쏜 민주인사다 이렇게 떠 받드는 사람들이 많은데, 정말 김재규는 민주주의를 위해서 박정희를 쏘았을까요?

부마사태 배후 조정을 한 인물이 김재규였고, 이미 박정희 정권 시절에 북한의 공작으로 박정희 주변에 많은 간첩들이 청와대 정부 정보부 군 내부 등에 주요한 보직에 고정간첩들이 암약을 하고 있었습니다.

부마사태때도 현장에서 유언비어를 살포하다 공수부대원들에게 체포된 사람이 있었는데 그게 바로 중정요원이었고, 김재규가 총을 쏘기 직전에 비서실장에게 해치우겠다고 미리 말을 했었고 비서실장은 “오늘?” 이렇게 반문을 했다고 한 사실은 다 기억을 하실 것입니다.

그리고 중앙정보부 내부에 육사 청죽회 비밀회원들과 공개회원들이 제법 있었고 이들을 김재규가 뒤를 봐주고 있었으며, 김재규가 총을 쏘는 날 정승화를 데리고 갔는데 정승화가 육사 청죽회 비밀 회원인지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육군대장이 바로 옆에서 중정요원들과 청와대 경호원들이 수십발씩 쏴대는 총성을 듣고 피범적인 된 김재규를 태우고 육본을 간 사실은 육본내에도 이미 육사 청죽회 회원들이 상당수 포진을 하고 있었다는 이야기되는 것입니다.

그 당시는 지금처럼 간첩들이 머리를 쳐들고 당당하게 활동을 못하던 시절이고 전두환이 청죽회 비밀조직에 대하여서는 하나도 모르고 있던 시절이라 청죽회가 518때 김재규와 김대중을 감시하고 보호할 수가 있었던 것이었고, 광주에서 북한군이 11공수여단장을 체포해 포로로 잡았을 때 마침 그 시간이 문재심 북한군 상장이 영광에 상륙해 광주로 진입하는 시간이라 풀어주게 지시를 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수협빌딩 집단발포로 북한군 400여명이 몰살당하고 결국 24일 북한군 철수가 결정되면서 11여단과 교도대대 교전에 대한 결정이 내려지자 바로 그 시간에 김재규의 사형을 집행해 버렸던 것입니다.

만일에 이을설이 수협빌딩 집단발포로 북한군이 몰살당하지 않고 건재 했다면 대전까지 진군을 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면 김일성이 전면 남침 공격을 하면서 미국과 북한이 협상을 하고 모든 정치범 석방을 조건으로 김대중과 김재규가 포옹을 하면서 교도소를 나섰을 것인데, 그런 장면대신 이을설의 작전 실패로 김재규를 바로 그 시간에 사형을 집행해 입을 막았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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