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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month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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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머리말

1장 천하를 꿈꾼 '호쾌'한 천재
1. 안동 김씨의 변족에서 사또의 양자로
세도 가문 장김의 아웃사이더로 태어나다
재종숙의 양자, 사또의 아들로 성장하다
여장부 같은 부인과 딸 그리고 혼외 자식들
2. 사람들 사이에서 빛나는 만능 재주꾼
사람 좋아하고 말 잘하는 '호쾌'한 천재
'시문서화 다 잘하는' 만능 엔터네이너

2장 역사의 전환기, 조선의 근대를 설계하다
1. 과거 시험 수석 합격 그리고 출세
장원 급제와 정관계 진출
새로운 시대의 벤처 관료, 개척사와 포경사가 되다
김옥균의 출세는 특별한 것이였을까?
2. 자본주의 시대, 개화와 자주독립의 길을 찾다
오늘의 중국이 어디 있느냐? 이리돌면 조선이 중국이다
실사구시의 개화에서 대경장의 개화로
'속국'의 굴레, 반청 자주독립을 외치다
양반 세도가의 땅 북촌, 개화이 산실이 되다
3. 사상과 종교의 벽을 넘나들다
김옥균은 유교를 부정했을까?
절에서 개화를 논하고 혁명을 모의하다
기독교의 유입을 인정하다

3장 갑신정변을 연출하다
1. 김옥균은 왜 정변을 일으켰을까?
벽에 부딪힌 개혁,혁명적 정변으로
절박한 정치적 위기에 처해 있는가?
행동대를 포섭하고 정변을 준비하다
2. 3일 천하, 46시간의 정변
첫날(10. 17), 우정총국 연회장에서 혁명의 깃발을 들다
이틀째(10. 18), 정적 제거와 개혁 내각 구성
사흘째(10. 19), 정령의 반포와 청군의 공격
3, '공공의 적'이 된 김옥균과 동지들
김옥균과 동지들의 막다른 선택지, 도망과 죽음 사이
사회적 타살에 던져진 가족들
4. 갑신정변의 평가, 매국과 애국 사이
갑신정변은 왜 실패했을까?
상반되는 평가, 모반 대역에서 애국 혁명까지

4장 다시, 조선을 꿈꾸다
1. 뿔뿔이 흩어진 망명 동지들
암울한 망명자의 길
깊어진 불신의 골, 뿔뿔이 흩어지다
남겨진 김옥균, 권토중래 노리다
2. 조선의 권력, 김옥균의 목을 노리다
고종의 끄나풀, 이재원의 편지와 유혹
고종, 킬러 도해포적사를 밀파하다
일본 정부의 계륵 김옥균, 이래도 저래도 골칫거리
3. 오가사와라 섬으로, 다시 홋카이도로 추방되다
태평양 절해고도, 오가사와라 섬에 유배되다
혹한의 땅, 홋카이도에서 재기를 꿈꾸다
4. '자유해방', 다시 조선의 길을 찾다
정치와 외교의 중심 도시, 도교로 돌아오다
냉엄한 국제 질서를 다시 보다
모험적 정치 행보와 사업 시도
조선, 또다시 자객을 파견하다

5장 예정된 피살, 동북아 삼국을 흔들다
1. 마지막 승부수, 목숨을 건지다
호랑이를 잡으러 호랑이 굴로
조선ㆍ중국ㆍ일본의 합작품, 김옥균 암살
왕조의 마지막 능지처사 그리고 세 개의 김옥균 가묘
2. 김옥균 평가, 애국적 혁명가와 매국적 반역자 사이

6장 경계를 넘어선 인간관계
1. 권력의 칼자루를 쥔 고종과 칼날 위의 김옥균
과거 시험장에서의 설레는 첫 만남
자주독립을 향한 공조와 정변의 묵인
왕권을 위협하는 자, 숨통을 끊어라!
2. '둘도 없는' 혁명 동지에서 절교로 끝난 박영효
불교 토론으로 만나 혁명 동지로
너무 다른 두 사람, 망명지에서 절교하다
'흠점만' 든 박영효의 김옥균 평가
3. 죽동궁 '민씨 왕자' 민영익
민영익의 죽동궁에 드나들던 8학사 김옥균
짧은 동행 그리고 '용납할 수 없는' 형세
서로의 목에 칼끝을 겨누다
4. 미국 공사 통역관 윤치호
제국의 시대, 영어 통역관의 길로 이끌다
마지막 재회의 무대, 상하이
5. 목숨을 건 갑신정변의 동지들
일편단심 김옥균 곁을 지킨 유혁로
최초의 여성 개화당원 고대수
6. 동남제도개척사 시절의 동지들
동남제도개척사 임무중 사망한 탁정식
김옥균을 위해 사지로 들어간 백춘배
그림자처럼 김옥균을 수행한 이의교
7. 민족의 경계를 뛰어넘은 인간관계
조선의 '영웅'을 아낀 미국 공사 푸트
일본 근대 최고의 지성, 후쿠자와 유키치
'수어지교'를 나눈 도야마 미쓰루
죽어서도 김옥균 곁에 묻히기를 원한 가이 군지
마지막 동행, 와다 엔지로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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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김옥균의 집에서 남쪽으로 조금 내려오면, 영의정 홍순목의 아들인 홍영식의 집이 있었다. 홍영식의 집은 한성부 북부 가회방에 있었는데, 현재 종로구 재동 헌법재판소 입구였다. 그의 집은 그리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에 있었으며, 대대로 명문거족이 거주하던 곳이다.
홍영식 집 바로 옆에는 박규수의 집이 있었다. 현재 헌법재판소 안 백송이 서 있는 부근이다. 박규수는 김옥균의 과거 시험 시관이었고, 박영효의 일가였으며 홍영식의 이웃이었다. 이러한 관계로 박규수 집 사랑에는 박영효ㆍ박영교 형제와 김옥균, 홍영식, 서광범 같은 젊은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서광범 집은 박규수 집에서 바로 아래쪽 지근거리에 있었는데, 안동별궁과 담장을 맞대고 있었다. 현재 풍문여고와 덕성여고 경계 지대나 덕성여고 남쪽 일대로 생각된다.
서광범 집에서 경복궁 광화문과 창덕궁 돈화문을 잇는 길(현 율곡로)을 건너 조금 내려가면 박영효의 집이 있었다. 박영효 집은 한성부 중부 경행방 오순덕계 교동에 있었다. 현재 종로구 경운동 88번지로 천도교 중앙대교당 자리이다. - 69쪽

김옥균의 생부와 양부는 모두 삭탈관직을 당했다. 그후 양아버지 김병기는 파양을 단행하여 김옥균과 양자 관계를 끊어 자신과 집안의 살길을 도모했다. 하지만 친아버지 김병태는 아들의 대역죄에서 벗어날 수 없었고, 천안의 감옥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다 김독균이 중국 상하이에서 암삵당한 두 달 뒤인 1894년 4월(양5월) 긴급히 교수형에 처해졌다. 자애로웠던 김옥균의 친어머니는 갑신정변 후 남편이 체포될 때 딸과 함께 독약을 마시고 자살했다. 또 진사였던 동생 김각균은 칠곡으로 도망쳤다가 붙잡혀 대구 감옥에 갇혔다. 김각균이 1894년 갑오농민운동 때 감옥에서 탈주하여 동학당에 가입했다는 설이 있었다. 그러나 개화당이 정권을 잡은 갑오개혁 이후에도 나타나지 않았고, 1908년 죽은 자들의 죄명을 벗겨줅 때 그의 이름이 명단에 들어 있는 것으로 보아, 대구 감옥에서 젊은 나이에 죽은 게 거의 확실해 보인다. - 131~132쪽

동지들 간에 사회적 신분과 위상을 경계로 갈등이 빚어지기도 했다. 양반 세도가였던 김옥균ㆍ박영효ㆍ서광범ㆍ서재필 네 사람은 숙도를 따로 마련하고 일본의 유지나 외국인들을 접견했으며, 행동대원들을 마치 집에서 데려온 집사처럼 부렸다. 이때 김옥균은 주로 유혁로가, 박영효는 이규완이 시중을 들었다. 이러한 처사에 이규완 등이 울분을 터뜨리며 비판하자, 김옥균 등은 얼굴을 붉히면서 그들에게 사죄했다.
이규완 평소의 태도는 동지를 대우하는 도리가 아니며 조목조목 을화가 치밀어 오릅니다. 적 어도 계급 사상의 폐단을 바로잡고, 널리 인재 등용을 포방한 공들이 망명한 우리 동 지들에 대하여 이 같은 태도를 취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이해가 안 됩니다.
김옥균 외 가장 신뢰하는 것은 제군들입니다. 정이 형제와 같아 후의에 맡겨 그런 것이지 결 코 가볍게 여겨 그런 것은 아닙니다.
이 일이 있은 후 동지들 사이가 서먹서먹해졌다. 당시 이규완은 김옥균, 박영효 등을 ‘수령파’로 지칭하고 자신들을 ‘의사파’라고 불렀다. 혁명적 인민평등권을 주장하던 그들도 현실 생활에 서는 신분의 굴레와 관행의 벽을 뛰어넘지 못했다. -150~151쪽
상층의 정변 주도층에게는 목숨이나마 부지할 수 있는 ‘망명’이라는 카드가 있었지만 하층의 행동대원들에게 망명이란 그림의 떡일 뿐이었다. 시대를 앞서간 그들에게 주어진 대가는 참혹한 죽음과 가족들의 처절한 희생이었다. 정변 이후 정부에 체포되어 심문받은 자들은 모두 23명이었고 20명이 처형되었으며, 2명은 유배되었고, 나머지 1명은 고문으로 사망했다. 남은 가족은 적물가산, 파가저택에 이어 형벌 또는 ‘자살’이라는 사회적 타살에 내던져졌다.

“신중모는 고종의 어가를 모시고 북묘까지 갔다가 위험한 상황을 눈치재고 도망했으며, 길에서 김봉균과 이희정을 만나 경기도 양근의 사나사라는 절에 이르러 삭발하고 중이 되었다가 붙잡혀왔다. 동대문의 소문난 장사로서 대신들을 살해한 윤경순은 곧바로 도망하여 전라도 곡성 땅으로 피신했다. 하지만 1885년 3월에 경기도 부평으로 올라와 농가에서 일을 하다가 체포되었다. 또한 군인이었던 낭창관은 전라도 고창으로 도망하여 이름을 바꾸고 고창 관아에서 하인 노릇을 하다가 붙잡혔다.”

저자는 김옥균 암살을 노리는 조선의 권력집단과 김옥균의 관계를 상세하게 그린다. 고종은 정변 이후 10여년간 김옥균의 목숨이 끊어질 때까지 집요하게 뒤쫓았다. 자객의 선정과 파견은 고종의 속내를 잘 아는 민씨 일파가 담당했다. 망명 초기 송병준, 장갑복, 지운영 등의 암살 기도가 이어졌다. 김옥균이 태평양의 오가사와라 섬과 홋카이도 유배되어 있던 1886년부터 1890년까지는 고종의 자객 파견이 뜸했으나 도쿄로 돌아온 이후 다시 자객을 밀파하였다.
1892년 4월, 이일직은 권동수ㆍ권재수 형제와 김태원, 홍종우에게 행동을 개시할 것을 명했다. 결국 김옥균은 이일직의 사주를 받은 홍종우에게 상하이에서 피살되었다. 고종의 일방적인 추격적이었고, 일본ㆍ중국의 협조 아래 이루어진 비겁한 보복이었다.
고종은 왜 그토록 김옥균 암살에 집착했을까? 고종은 갑신정변 책임론에서 자유롭지 못했다. ‘역적’처단 문제를 전면에 내세워 반전의 기회를 노린 것이었으며 차후에라도 정계에서 왕권을 제한하는 입헌군주제가 제기되지 않도록 철퇴를 가해야 했던 것이다.

저자의 말
만일 그때 죽지 않았다면, 김옥균은 또 어떤 모습으로 우리에게 비추어졌을까? 친일파, 독립운동가, 무역상, 방랑 시인, 투기꾼……. 무한 상상이 가능하리라. 많은 사람이 박영효처럼 친일파가 되었을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서 김옥균이 죽을 때와 자리를 잘 선택한 것이라고도 한다. 그럴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의 대담한 기질과 모험적 열정, 불의와 타협하지 않는 성격, 조선의 독립을 향한 일편단심 등을 반추해보면, 오히려 만주 벌판의 독립운동가나 세계를 누비는 모험적 무역상, 누군가의 자본을 이용한 광산 경영자 등의 모습을 상상하는 게 더 자연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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