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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months ago

프롤로그
조선은 동방노예지국이었다

제1부 개천에서 용 난다
오백년 도읍지 서울을 짓다/신생 조선의 토목건축을 주도한 박자청
북변의 일은 내게 맡겨라/북방전문가로 활약한 반기문의 조상 반석평
그래, 나는 소소인(小小人)이다/광해군과 인조의 수호천사 정충신
집집마다 신의 의술을 만나게 하리라/허준도 인정한 침구술의 대가 허임
▲마소보다 못하구나. 사노비
▲양인들도 부러웠다. 공노비

제2부 전설이 된 사람들
외눈으로 단종애사를 예견하다/은인 세종의 역린을 건드린 풍수학자 목효지
울릉도와 우산도는 조선 땅이다/대마도의 국토 침탈 음모를 물리친 안용복
노비인가 제갈공명인가/반노의 자식으로 재야를 전전한 천재 송익필
그때나 지금이나 저는 전하 편이랍니다/영조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던 지관 목호룡
▲노비 증식의 주범, 일천즉천
▲노비 매매, 노비 자매의 비극

제3부 우여곡절 여인사
그저 멀리서 바라보기만 할뿐/고독한 임금 세종의 따뜻한 둥지 신빈 김씨
나는 조선의 공주다/관노로 전락했던 문종의 딸 경혜공주
내게 죄가 있다면 하늘에 물어보라/노비를 사랑했던 양녕대군의 딸 이구지
누가 나를 요녀라 부르는가/문정왕후를 도와 불교 부흥을 이끈 정난정
▲노비들의 평생소원, 면천
▲도망친 노비를 잡아들여라, 노비 추쇄

제4부 울며 세상을 노래하리라
우리 그냥 사랑하게 해 주세요/세조를 난처하게 했던 양성인 사방지
백성들은 어찌 살란 말이냐/부조리한 시대를 질타한 시인 어무적
오동나무 비 젖으면 애간장이 타는구나/애틋한 순애보를 남긴 예학자 유희경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는 시를 쓰겠다/종놈으로 왔다가 시인으로 떠난 이단전
▲곱단이와 도야지, 내 이름은 무엇인가?
▲문선왕(文宣王)의 가호를 받았던 성균관 노비

제5부 끝나지 않은 이야기
정도전과 단양 우씨 가문의 천출 시비
노비제도에 맞선 사람들
노예제도의 역사

■에필로그/조선, 공자를 욕보인 나라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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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조선의 역대 위정자들은 자신들의 시스템에 순응하여 아첨하고 타협하는 사람들에게는 달콤한 꿀을, 질문하고 반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무자비한 응징을 가했다. 겉으로는 위민정치를 내세웠지만 실상은 폭압적인 공포정치를 바탕으로 이 양반 저 양반들이 오백년 내내 그들만의 태평성대를 누렸던 것이다.
그렇다면 민주주의가 정착되었다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어떤가? 남해 캄캄한 물속에 생떼 같은 자식을 묻은 어버이들은 진실의 문을 열어달라며 끼니를 닫는데, 사람들은 몇 백 년 전 그 바다의 영광스런 승리에만 눈 비빈다. 부조리한 세월의 도가니 속에서 우리네 자식들이 그렇게 멍들고 피 흘리는데 가만히 있으라, 그저 가만히 있으면 안전하다고 속삭인다. 굴종하는 이들의 천국, 저항하는 이들의 지옥, 대체 온고지신(溫故知新)의 한국사는 어디에 있는 걸까. -pp6~7

조선의 경우 역시 종교와 철학이 노예제도를 수용했고 경제 여건과 사회적 의식 변화에 따라 노예의 증감이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서양의 노예제도와 크게 다르지 않다. 게다가 조선의 위정자들은 종주국 원(元)의 조롱을 받으면서도 꿋꿋하게 노비제도를 고수했던 고려 귀족들처럼 구태의연한 노비제도를 개선하기보다는 개악을 통하여 부를 확대하기까지 했다. 실로 조선이란 나라는 예를 하늘처럼 받드는 동방예의지국인 동시에 동족을 노예로 부렸던 동방노예지국에 다름 아니었다. -pp12~13

《춘향전》의 암행어사 이몽룡이 탄식했던 것처럼 양반들의 잔칫상에서 촛농이 떨어질 때 백성들의 눈물이 떨어지고, 기생들의 노랫소리 높은 곳에 백성들의 원망소리 또한 높았다. 그 덕에 신분상 천민이지만 수탈의 대상에서 제외될 수밖에 없는 월급쟁이 공노비는 일약 선망의 대상이 되었다. 궁지에 몰린 양민들은 딸자식을 공노비에게 시집보내기 위해 줄을 섰다. 양난 이후 고삐를 놓쳐버린 행정체계가 조선의 강고했던 신분제도를 뒤흔들었던 것이다. -p122

그 후 태종은 장차 세종이 외척에게 휘둘릴 것을 염려하여 영의정부사에 오른 장인 심온을 처형하고 장모 안 씨를 의정부의 여종으로 내쳤다. 그렇게 청송 심 씨 가문을 멸문시키는 과정에서 태종의 집사 노릇을 했던 박은이 애꿎은 욕을 먹었다. 이때의 참화로 오늘날까지 청송 심 씨와 밀양 박 씨는 혼인하지 않는다고 한다. 당시 조정 중신들이 소헌왕후 심 씨의 폐출까지 논의하자 태종은 눈을 부라렸다.
“내가 새 며느리를 들여 또 다시 그 집안을 박살내라는 말이냐?”
그 말에 대신들의 목이 움츠러들 수밖에 없었다. 만일 자기 자식을 중전으로 들여보냈다가는 여흥 민 씨 일문이나 청송 심 씨 일문처럼 태종의 철권을 피할 수 없을 것이었다. 집안이 멸문된 상황에서 죄인의 딸로 전락한 소헌왕후 심 씨의 당시 심정이 어떠했을까. -p220

조선 중기에 발생한 임진왜란은 국가나 백성들에게는 일대 재앙이었지만 최하층 노비들에게는 구원의 나팔소리였다. 1592년(선조 25) 봄 일본군이 북상하면서 선조가 궁궐을 떠나자 노비와 피난민들은 장예원과 형조를 습격하여 노비문서를 모두 불태웠다. 그 때문에 자유의 몸이 된 노비들은 군대에 들어가 신분을 확실히 세탁하거나 타향으로 도망쳐 살았다. -p282

특권을 누린 반인들이었지만 일반의 차별과 천시에서는 자유롭지 못했다. 한양의 백성들은 그들을 백정이라 여기고 상종하지 않았던 것이다. 이에 맞서 반인들은 외부인들과 친교, 결혼 등 일체의 사회적 관계를 맺지 않았다. 그들은 매우 사치스러운 복색과 호협한 기질, 폭력적인 성향이 있었는데, 말투도 개성 사람들과 유사했다고 한다.
갑오개혁으로 신분제가 사라진 뒤에도 백정이란 멍에를 등에 지고 살아가야 했던 반인들은 자식들에게 천역을 물려주지 않기 위해 교육 사업에 전력을 기울였다. 외부 학교에서 아이들을 받아주지 않자 돈을 모아 1910년 1월 25일 혜화동에 보통학교 과정의 사립 숭정학교를 세우기까지 했다. 이 학교는 훗날 공립 혜화초등학교로 바뀌었는데 명문 경기중학교 진학률이 전국에서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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