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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서문_ 모든 식탁은 역사로 통한다

1장 중국을 만든 음식
하은주_ 고대 중국에서는 요리사가 재상
하은주_ 중국인의 조상은 물고기?
춘추전국_ 귤 한 상자면 떼부자
한_ 황제는 하루 네 끼, 제후는 하루 세 끼
한_ 조개가 돈으로 쓰인 내력
위진남북조_ 북방, 오랑캐 음식이 판치다
수당_ 오랑캐는 우유, 한족은 차
송_ 송나라 경제와 국수 천국
원_ 월병과 토란, 중추절 음식이 까닭?
명_ 황제의 밥상에 오른 돼지고기
청_ 만주의 귀족들, 샥스핀에 빠지다
한마디로 노동자 중에서도 가장 비참하고 가난했던 막일꾼들의 음식이었단 얘기다. 하루 벌어 하루 먹고 살기도 힘든 이들이었으니 제대로 된 고기를 사 먹을 돈이 있을 턱이 없었다. 때문에 내다 버리다시피 하는 소 창자와 천엽, 그리고 오리 내장 등 부스러기 고기를 긁어모아 잠깐 쉬는 틈에 펄펄 끓는 육수에 데쳐 먹고는 서둘러 일하러 갔던 것인데, 이런 전통이 남아 있기에 지금도 충칭훠궈의 재료로 소의 천엽과 내장 등이 인기가 높다고 한다.

-본문 211~212쪽
빵과 국수, 그리고 만두는 모두 밀가루를 반죽해 만든다. 서양에서 최초의 빵은 고대 이집트에서 만들어졌다. 원시적 형태겠지만 기원전 10세기 이전으로 추정한다. 그리스인들과 로마인들도 빵을 먹었다. 중국에서 한나라가 세워지기 이전의 일이다. 그런데 같은 밀가루 음식임에도 중국인들이 국수와 만두를 먹은 시기는 훨씬 늦다. 우리가 아는 국수는 당나라 내지는 송나라 때 처음 생겼다. 만두 역시 한나라가 망한 후, 그것도 삼국 시대가 거의 끝나갈 무렵에야 만들어졌다.
-본문 247~248쪽

동양인은 언제부터 음식에다 시험 통과의 소망을 담아 먹기 시작했으며 최초의 합격 기원 음식은 무엇이었을까? 남아 있는 기록은 없으니 전설처럼 전해지는 이야기를 토대로 추측해보면, 아마 당나라 선비들이 과거 시험을 보러 갈 때 먹었다는 돼지족발이 최초가 아니었을까 싶다.
당나라 때는 과거 시험이 끝나 장원 급제자가 나오면 붉은색 먹으로 급제자의 이름과 답안지 제목을 적어 당나라 수도였던 장안에 있는 대안탑에다 붙였다. 이렇게 장원 급제자의 이름과 시제를 붉은 글씨로 적은 대자보를 ‘주제(朱題)’라고 했다. 중국어로는 ‘주티’다. 그런데 이 주티(朱題)와 돼지족발을 뜻하는 ‘주티(猪蹄)’가 발음이 같다. 그렇기에 과거를 보러 가는 당나라 선비들이 돼지족발을 먹으며 장원 급제해 자기 이름과 답안 제목이 붉은색 먹으로 쓰여 대안탑에 내걸리기를 소원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당나라 때부터 이어져 내려온 풍속인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도 중국 일부 지방에서는 시험 볼 때 합격을 빌며 돼지족발을 먹는다. 돼지족발의 유래가 진실인지 확인할 방법은 없지만, 당나라 때 과거에 급제하면 붉은색으로 이름과 시제를 적는 주제라는 제도가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본문 269~270쪽

과거 중국에서는 어쩌면 나름 냉방장치를 갖춘 곳에서 빙수와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21세기의 우리 못지않게 더위를 잊고 시원하게 지냈을지도 모른다. 물론 모든 사람이 그랬다는 것은 아니고 극소수의 황제와 귀족, 부자한테 해당되는 이야기다.
옛날에도 무더운 여름이면 제후와 귀족, 부자들은 다양한 방법으로 더위를 식혔다. 하지만 단순히 계곡을 찾아 찬물에 발 담그고 부채질하는 수준이 아니었다.
“한왕(韓王)은 여름이 되면 차가운 음식을 찾았다. 세자가 사재를 들여 얼음방을 만들고 국과 반찬을 저장했다가 차가워지면 왕에게 바쳤다.”
이는 『천록각외사』라는 문헌에 실린 내용이다. 여기서 한왕은 기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 무렵 전국 시대 한나라의 왕이다. 2300년 전 여름에 지금의 냉장고처럼 얼음 가득 채운 방을 만들어 음식을 보관했던 것인데, 특히 주목할 부분은 사재를 들여 얼음방을 만들었다는 대목이다.
원전 4세기에서 기원전 3세기에 벌써 시장에서 얼음이 유통되고 있었다는 것이니 돈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여름을 시원하게 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
요즘 호텔 연회장에서나 볼 수 있는 얼음 조각, 아이스카빙(ice carving)도 당나라 때 등장한다. 양귀비 덕분에 출세한 양귀비의 오빠 양국충과 그 아들은 분에 넘치는 부와 권력을 자제할 줄 몰랐다. 당나라사람 왕인유가 현종 때의 풍문을 모아 기록했다는 『개원천보유사』에 양국충 일가의 피서법이 실려 있다.
해마다 여름 복날 무렵이면 양국충의 아들이 얼음산을 만든 후주변에 좌석을 배치해 연회를 열었는데 자리에 앉은 손님들은 한여름 삼복더위에도 추위에 떨며 술잔을 기울였다. 또 장인을 시켜 얼음으로 봉황과 여러 동물 형상을 조각한 후 금띠로 장식해놓고 왕공대인들과 여름을 보냈다고 하니 얼음 조각이 천연 에어컨 역할을 한 셈이다.
-본문 291~293쪽

과거 시험이 평민들에게는 이무기가 용이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황제에게는 인재를 발굴해 관리로 중용함으로써 세습 호족의 세력을 견제해 왕권을 강화할 기회이기도 했다. 과거 시험에 장원 급제하면 당장 관청이나 황제가 마련한 잔치가 줄줄이 이어졌고, 그 자리에서 신분이 달라졌음을 바로 느낄 수 있도록 극진히 대우했다. 당연히 선발 과정도 엄격했는데, 초창기에는 그 정도가 지나쳐서 개그의 소재로 삼을 만한 정도다. 지금은 거의 쓰지 않는 표현이지만, 예전에는 공부는 많이 했지만 별 볼 일 없는 지식인을 비꼬아서 말할 때 먹물깨나 마셨겠다며 비아냥댔다. 오징어 먹물도 아니고 붓글씨 쓰는 먹물을 마신다는 것이 가당치도 않지만, 이는 실제로 과거 시험을 제대로 보지 못하면 벌칙으로 먹물을 마셔야 했던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남북조 시대 북제 때 있었던 일이다. 북제는 550년부터 577년까지 불과 27년을 존속했던 나라지만, 수나라에서 과거 제도가 시행되기 전에 벌써 옛 북위의 제도를 이어받아 인재 선발 고시를 실시했다. 각 군현에서 인재를 추천받아 황제 앞에서 시험을 치르는 수재와 효렴 같은 시험이었는데 이때 황당한 일이 있었다. 황제가 조정에 앉아 친히 시험을 주재했는데, 글씨를 제대로 못쓰는 자가 있으면 일으켜 세워 벌로 먹물 한 되를 마시게 했고, 글자 중에 문장이 제대로 안 될 정도로 탈자나 오자가 있으면 답안지를 추적해 역시 먹물 한 되를 마시도록 했다. 『수서』 「예의지」에 나오는 기록이니 먹물깨나 마셨겠다는 말이 그냥 생긴 말이 아니라 역사 기록에 근거를 두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본문 273~27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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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서평
오천 년 중국사의 흐름이 보이는
32가지 음식 이야기

역사는 음식과 만나는 순간 비로소 생생한 입체감을 더하게 된다. 중국 황실의 운명을 바꾼 결정적인 순간에 난데없이 호떡이 등장한다니, 도대체 무슨 일일까. 756년 안녹산이 반란군을 이끌고 수도인 장안으로 쳐들어왔을 때, 피란길에 나선 현종과 양귀비는 허기를 달래고자 양국충이 사다 바친 호떡을 먹었다. 왜 하필 호떡이었을까? 호떡의 뿌리는 서역의 중앙아시아에서 먹는 난이라는 밀가루 빵인데, 실크로드를 거쳐 중국으로 전해졌다. 호떡이 전해지면서 중원의 상류층에는 오랫동안 호떡 열풍이 불었고 한나라 제12대 황제인 영제는 매일 호떡만 먹다시피 하고 살았다. 호떡이 길거리 간식이 아니라 상류층의 별미였던 것이다. 이를 통해 실크로드가 열린 이후 서역의 문명과 문화가 중원보다 앞섰거나 최소한 뒤지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 한 가지 특기할 만한 점은 이 책은 절대적으로 중국의 역사만을 잘라내어 마치 모든 문물이 중국을 기점으로 세계로 퍼졌다는 중국 중심주의 세계관을 지양한다는 점이다. 이 책의 2장에는 소주, 후추 고구마 등 중국의 국경을 넘나든 음식들을 통해 당시 세계정세와 정치, 경제, 문화 교류의 역사를 확인할 수도 있다. 일례로 15세기부터 시작된 유럽의 대항해 시대 개막은 향신료 무역이 직접적인 동기였고 그 중심에는 후추가 있었다. 중국에서도 후추가 서양 못지않게 귀하고 비싼 것은 마찬가지였고 후추에 열광했던 것 역시 서양보다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는 않았다. 그 때문에 중국에서도 15세기에 후추를 찾아 대항해를 떠났고 그 결과 후추를 비롯한 대량의 향신료를 확보했다. 후추 덕분에 건국 초기의 명나라는 안정적 기반을 다질 수 있었지만, 후추로 인한 권력다툼 때문에 명나라가 쇠약해졌다. 후추가 중국 역사를 바꾸는 계기가 된 것이다.
중국의 근현대사에서 음식이 중요한 역할을 하기는 마찬가지다. 1971년, 중국과 미국이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비밀 협상을 통해 화해와 수교로 이어질 수 있었던 것은 식사 자리에서 나온 베이징 오리구이 덕이 컸다. 팽팽한 긴장과 줄다리기 속에 깨지기 일보 직전까지 갔던 협상이 점심 식사를 기점으로 화해의 물꼬가 트이기 시작했다. 미국 특사 헨리 키신저에게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밀전병에 오리구이를 싸주며 베이징 오리구이를 먹는 법과 유래에 관해 설명하면서 분위기가 한결 부드러워진 것이다.

문화와 철학, 풍속과 시대가 녹아 있는
본격 식사 인문서

이 밖에도 생선, 양고기, 복숭아 등 중국인이 신성하게 여기는 음식을 통해서 고대 중국부터 이어져 내려온 중국 문화의 뿌리를 확인할 수 있다. 중국의 모습 하나하나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일반 상식과는 다른 부분이 적지 않다. 우리가 아는 중국은 어쩌면 진짜 모습이 아닌 고정 관념으로 보는 허상, 중국이 됐건 혹은 우리 스스로가 됐건 실체가 아닌 관념 속에서 빚어낸 가짜 모습일 수 있지 않을까.
‘You are what you eat’이라는 말이 있다. 우리가 먹는 음식이 우리의 몸과 마음을 규정한다는 뜻이다. 역사도 마찬가지다. 한 시기를 풍미한 음식들은 그 자체로 긴밀하게 정치, 사회, 문화를 이해하는 가장 원초적인 코드가 된다. 음식은 거짓말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금도 명동, 홍대 등 번화가 거리 곳곳에는 중국인 관광객으로 북적인다. 중국은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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