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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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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_ 책의 피부를 가르며: 모든 의사는 홈스의 후배다

CHAPTER 1_ 세종의 허리: 조선 최고의 리더가 운동을 싫어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
CHAPTER 2_ 가우디의 뼈: 천상의 건축가는 왜 하필 해골 집을 지었을까?
CHAPTER 3_ 도스토옙스키의 발작: 세계적인 대문호가 도박꾼이 된 사연
CHAPTER 4_ 모차르트의 부종: 음악 신동의 사인은 질투인가 돼지고기인가?
CHAPTER 5_ 로트레크의 키: 물랭 루주의 천재 화가는 왜 난쟁이로 태어났을까?
CHAPTER 6_ 니체의 두통: 실존 철학의 선구자는 어쩌다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까?
CHAPTER 7_ 모네의 눈: 인상파의 거장이 추상화처럼 그릴 수밖에 없었던 까닭은?
CHAPTER 8_ 프리다의 다리: 자화상의 대가는 왜 자기 자신을 붉은 과일로 그렸을까?
CHAPTER 9_ 퀴리의 피: 노벨상 2회 수상 과학자가 정말 방사능의 위험을 몰랐을까?
CHAPTER 10_ 말리의 피부: 희망을 노래한 레게의 대부는 왜 암을 방치했을까?

나가는 말_ 책의 피부를 봉합하며: 의사는 손톱을 기르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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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천사
오후 (우리는 마약을 모른다》 《믿습니까? 믿습니다!》 저자)
ㆍ 작가는 자신을 셜록 홈스에 비유하지만 그의 이야기는 셰익스피어에 더 가깝다. 특정한 병으로 시작하는 ‘썰’들 속에서 단순히 위인으로만 알고 있던 이들의 인생사가 조금 더 다이내믹하고 입체적으로, 무엇보다 인간적으로 다가온다. 어느 때는 신체에 굴복하고, 어느 때는 그 한계를 뛰어넘어 펼쳐지는 인생 드라마에 누구라도 매혹될 수밖에 없다.

원고 마감에 쫓기는 노름꾼
도박에 빠진 방탕한 모습과는 달리 도스토옙스키는 철저한 그리스 정교 신자였다. 도스토옙스키를 접한 사람들은 입을 모아 그를 ‘성자의 재림’이라 칭했다. 그 성자는 매일 룰렛을 돌렸고 소설을 쓰겠다며 가불을 받은 돈까지 잃는다. 정작 글은 하나도 쓰지 못해 위약금을 물어야 할 판인데 마감일은 26일 뒤로 다가왔다.(중략)
다행히 스니트키나는 상당히 유능했다. 도스토옙스키의 횡설수설한 문장을 정갈히 글에 담아낸다. 26일 만에 원고가 나왔고 17장으로 구성된 소설이 탄생했다. 제목은 《노름꾼》이다.
원고는 계약 마감 2시간 전에 편집자에게 전달된다. 쫓기는 26일을 함께 보낸 46세의 도스토옙스키와 21세의 스니트키나는 이후에 결혼한다. 소설보다 재미있는 이 일화는 영화로도 제작된다. 결말은 행복하지만 과정의 기괴함은 찝찝하다. 순례자와 같다던 도스토옙스키는 어째서 끊임없이 도박을 했을까 -〈본문 63~65쪽〉
나이대별로 분석하면 무릎과 허리 통증은 20대 초반에 발생했고 30대에 심해졌으며 눈 통증은 40대부터 악화됐다.(29쪽) 그는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나면 허리와 등이 뻣뻣하게 굳어서 굽히기 힘들 정도로 아팠다. 또 눈이 까끌거리고 앞이 잘 안 보이는 증상이 심해졌다가 씻은 듯이 나아지기를 반복했다. 이런 허리와 눈 증상을 동시에 발생시키는 질병은 단 하나, 척추에 염증이 생겨 허리뼈가 대나무처럼 굳고 합병증으로 포도막염을 일으키는 ‘강직성 척추염’이다. 세종도 말타기, 사냥, 격구를 즐기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강직성 척추염이 불러온 끝없는 통증이 그를 주저앉히고 만 것이다.(7쪽)

ㆍ 천상의 건축가 가우디는 왜 해골 집을 지었을까?
수많은 관광객을 불러들이며 현재의 스페인 바르셀로나를 먹여 살린다는 농담 반 진담 반 이야기를 만들어 낸 가우디. 그런데 그의 건축물들은 묘한 공통점이 있다. 건물 곳곳에서 뼈와 해골 형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가우디가 지은 건물을 두고 평론가들은 혹평했고 주민들은 동네 미관을 해친다며 거칠게 항의했다.
그 이유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관절염을 앓았기 때문이다. 그는 종종 형의 등에 업히거나 나귀를 타고 등교해야 했을 정도로 관절통이 심했다. 병세 때문에 입학도 늦어 제대로 친구를 사귀지 못해 외로운 학창 시절을 보냈다. 게다가 관절통을 조금이라도 줄이기 위해 평생 2겹의 양말과 푹신한 신발을 신고 다녔다. 평생 관절통을 달고 살았던 그였기에 인체와 뼈에 큰 관심을 가진 것은 어쩌면 당연한지 모른다. 하지만 그의 관절염은 결국 안타까운 죽음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1926년, 가우디는 노면 전차에 치여 정신을 잃고 쓰러진다. 하지만 주변의 누구도 그를 도와주지 않았다. 겹겹이 신은 양말과 남루한 신발 차림 때문에 부랑자로 오해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골든 타임을 놓친 그는 결국 사고 발생 3일 후 세상을 떠난다.(39쪽)

ㆍ 세계적인 대문호 도스토옙스키가 도박꾼이 된 사연
도스토옙스키는 못 말리는 도박꾼이었다. 유산과 원고료를 모두 날리는 것은 예사였고 원정 도박에 나섰다가 돌아갈 경비까지 잃기 일쑤였다. 원고 마감에 쫓기면서도 룰렛과 카드를 돌렸는데, 오죽했으면 독일의 비스바덴 쿠어하우스 카지노가 그를 두고 ‘기념할 만한 호구’라며 그의 이름을 딴 홀을 만들고 흉상을 세웠을 정도다. 도스토옙스키가 이처럼 지독하게 도박에 중독된 이유는 그가 간질 발작 환자였기 때문이다.
그는 언제 어디서 발작이 자신을 덮칠지 몰라 평생 전전긍긍했다. 심지어 자기 결혼식 피로연에서 2번이나 발작을 일으킬 정도였다. 그런데 간질 발작 환자는 평범한 사람보다 흥분 신경 전달 물질이 많다. 흥분 물질이 많으면 도박이 주는 자극에 취약하다. 그래서였을까? 그의 작품에는 간질 발작을 일으키는 주인공이 많이 등장한다. 마치 소설을 통해 발작을 예방하고 싶었던 것처럼 말이다.(61쪽)

ㆍ 실존 철학의 선구자 니체는 어쩌다 정신 병원에 입원했을까?
학창 시절 “사원에 숨은 열두 살짜리 예수 같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니체는 추천사만으로 대학교수에 임용되고, 1년 동안 여러 저작을 집필했으며, “신은 죽었다”고 당당하게 선언할 만큼 자신만만하고 탁월한 철학자였다. 하지만 그는 어렸을 때부터 심한 두통과 불면에 시달렸으며, 나이가 들어서는 온화한 성격이 괴팍하고 폭력적으로 변해 버렸다. 폭언과 폭력을 일삼는가 하면 자신의 소변을 마시는 등 기이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결국 1899년 친구의 손에 의해 정신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하지만 다음 해에 퇴원한 후 그는 180도 달라졌다. 누구도 제대로 알아보지 못했고 살아 있는 시체처럼 무기력하게 지낼 뿐이었다. 결국 1900년 폐렴으로 사망한다. 그의 뇌와 영혼을 파괴한 질병은 무엇일까? 당시 니체는 신경 매독에 걸렸다는 진단을 받았는데, 신경 매독 환자는 식욕이 없고 팔다리를 심하게 떤다. 그러나 니체는 자주 폭식했고, 손편지를 쓰거나 피아노를 칠 정도로 떨림 증상이 없었다. 극심한 두통, 불면증, 발작, 성격 변화를 한꺼번에 설명할 수 있는 병은 바로 뇌종양이다. 커다란 종양이 니체의 머릿속에서 천천히 자라면서 뇌와 신경을 압박한 것이다.(141쪽)

ㆍ 인상파의 거장 모네의 말년 화풍이 추상화처럼 변한 까닭은?
1873년 모네가 〈인상, 해돋이〉라는 작품을 발표하자 한 비평가는 “제목 그대로 인상적인 쓰레기”라고 혹평했다. 그런데 모네는 도리어 이런 평가를 마음에 들어 하며 자신의 화풍을 인상파라고 정의해 버린다. 모네와 인상파 화가들은 이후로 오랫동안 미술계의 무시와 멸시를 이겨 냈고 마침내 제대로 된 가치를 인정받았다. 세간의 평가와 온갖 한계에 부딪쳐도 그는 결코 좌절하지 않았다. 1908년, 자기 눈에 찾아온 백내장이라는 질병 앞에서도 그는 흔들리지 않았다. 증세가 심해지면서 그의 그림은 색과 형태를 제대로 구분할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마치 추상화를 그린 것처럼. 빛의 화가가 빛을 잃었으니 그 상실감과 자괴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끝까지 붓을 놓지 않았다. 그리고 1923년 백내장 수술을 받아 시력과 자신의 화풍을 되찾는다.
그가 흔들린 것은 도리어 그 이후였다. 모네는 백내장을 앓았던 때 그렸던 자기 그림들을 불태우고 박살 내기 시작했다. 자신의 작품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였을까? 아니면 괴로운 과거를 떠올리기 싫었던 것일까? 하지만 그의 며느리와 친구들이 그때의 그림을 숨기고 보관해 둔 덕분에 우리는 미술을 향한 모네의 열정, 한계를 극복하려는 예술가의 혼을 마주할 수 있다.(167쪽)

ㆍ 레게의 대부 밥 말리는 왜 암 수술을 거부하고 사이비 치료를 받았을까?
말리는 흑인 노예 후손인 어머니와 영국 귀족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났다. 빈부 격차, 인종 차별, 정치와 이념 갈등 등 혼란했던 1960년대 자메이카의 빈민촌에서 자란 그는 ‘웨일러스’라는 밴드를 만들었다. 그가 노래한 평화와 희망의 메시지는 전 세계로 퍼져 나갔고, 암울한 시대를 살아가는 전 세계 젊은이들에게 한 줄기 빛을 선사했다. 자메이카 정부는 세계적인 슈퍼스타가 된 그의 영향력을 두려워했다. 1976년 12월 자선 공연을 앞두고 저격 사건이 벌어지기까지 했다. 누가 왜 그를 쏘았는지 밝혀지지 않았지만 공연을 포기하라는 위협의 메시지는 분명했다. 하지만 말리는 총상을 당당히 드러내며 공연을 이어 갔다.
밥 말리는 때, 장소, 멤버를 가리지 않는 축구광이었다. 공을 찰 때면 모든 근심을 잊을 수 있다던 그였다. 하지만 그는 공을 차다가 일생의 최대 시련과 맞닥뜨린다. 엄지발가락을 다쳐 병원을 찾았는데 가벼운 부상으로 여겼지만 검사 결과는 청천벽력이었다. 신체 말단에 까만 점 모양 병변이 생기는 피부암, 말단흑색점흑색종이었다. 하지만 말리는 암 수술을 거부했다. 왜냐하면 그는 신체 훼손을 금지하는 종교 ‘라스타파리’의 독실한 신자, 일명 ‘라스타맨’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말리는 식이 요법과 열 치료만으로 암을 치유할 수 있다고 주장한 요제프 이젤스에게 치료를 맡긴다. 하지만 이젤스의 치료는 사이비였다. 1961년 사기 및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된 전적도 있었다. 당연히 이젤스의 치료는 효과가 없었고 증세는 더욱 악화되었다. 결국 말리는 37세의 젊은 나이에 우리 곁을 떠나고 말았다. 말단흑색점흑색종은 주로 60대에 발병하기 때문에 말리에게 너무 일찍 찾아온 것이 안타깝다. 하지만 더 안타까운 것은 그가 제대로 된 치료를 받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말리는 노래를 통해 전 세계인에게 희망을 안겨 주었지만 정작 본인은 완치의 기회와 희망을 놓치고 말았다.(25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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