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군은 처음부터 없었다 42년동안 국가와 국민을 속였다

1 year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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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0년 5월18일 0시부터 북한군 중장 이을설이 518 광주 군사반란을 지휘하면서 또 다른 동족상잔 아니 동네사람 상잔이 시작되었는데, 18일부터 대규모 군사반란이 시작되었다는 것은 이미 수개월 전부터 정찰과 정보수집 작전계획 수립과 조직구성 등 많은 준비가 필요했던 것은 자명한 일입니다.

북한군 중장 신분인 이을설이 광주에 잠입을 하고 북한 특수군 600명이 광주에서 특수작전을 실행을 하는데, 그 준비 기간이 1주일 걸렸겠습니까 1달 걸렸겠습니까? 최소한 수개월은 준비를 해야만 가능한 작전일 것이라는 것은 상식입니다.

600명이나 되고 북한군 현역 중장이 광주에 잠입을 해서 특수 작전을 하는데 단독으로 가능할 것 같습니까?

이들을 안내하고 호송하고 은신시켜주면서 먹여주고 재워줘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김대중여단 반란군 4천여명이 했고, 그들과 함께 비밀리에 작전을 준비했다는 것도 상식일 것인데, 518 군사반란 당시 이을설 중장이 지휘했던 군분교 점령작전과 11여단 유인 사격작전을 보면 얼마나 철저하게 손발이 잘 맞았는지 알수가 있으며, 작전지휘와 통신체계 그리고 보급 체계와 후속 수습 작전을 한 것을 보면 다 증명이 되는 것입니다.

이런 북한군과 김대중여단 병력은 대략 5천명 정도였으며, 그렇기에 44군데 무기고에서 무기를 꺼내는 숫자를 5400여정 정도로 확정을 하는 무기고 습격계획을 518 진조위 위원장인 송선태가 기획을 하고 이을설이 승인을 했고, 승인된 작전을 전교사와 31사단이 참여해 단 한건의 충돌사고도 없이 일사분란하게 아시아 자동차에서 강탈한 차량을 44군데 무기고 앞에 대자마자 무기들을 적재하고 광주로 옮길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44군데 무기고에서 탈취한 5400여정의 무기는 김대중 여단 병력들과 북한군들이 무장을 했는데, 이런 반란군 세력들이 시민이며 시민군이 될 수가 있다는 말인가요?

불과 1~2백명의 광주의 양아치 수준의 사람들만 총기를 들고 반란군에게 협조하는 척하면서 밤이면 강도질을 하고 부녀자 강간을 했던 것인데, 이들 1~2백명이 그럼 시민군이란 말인가요?

처음부터 작계 80518 계획을 수립할 때 시민군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선전선동을 하는 반란군 부서들이 꾸며낸 말일뿐이며, 이런 선전선동 언어들을 지만원과 김대령 그리고 조갑제 같은 인물들이 되받아 사실처럼 만들어 냈을 뿐 입니다.

무기고에서 꺼낸 무기 숫자와 북한군 숫자 그리고 김대중 여단 반란군 숫자만 맞추어 봐도 답이 나오는데, 이런 부류들에게 시민군이란 칭호를 뒤집어 씌워 시민군과 계엄군의 대칭적 사고방식을 국민들에게 각인시킨 이들이 독점적으로 518 북한군 운운하면서 책을 발간해 사실처럼 만들어 갔던 것을 잊어서는 안될 것입니다.

자진해서 무기고로 달려가서 무기를 빼앗았다면, 왜 단 한 건의 충돌 사고도 없었을까요?

이런 무기고 습격은 무기 공급을 감춘 김대중 여단 소속의 전교사와 31사단의 장사병들과 김대중 여단 반란군들의 합동작전이 아니면 불가능하다는 점을 아시고, 시민군들은 존재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새삼 인식하시길 바랍니다.

시민군 용어를 배포한 위장우파들과 정보의 부재로 그런 선전선동 전술에 속아 넘어간 애국시민들은 하루빨리 저들의 술책에서 벗어나 진정한 애국활동을 하시어 하루빨리 518 군사반란 세력을 척결하는데 앞장서 주시 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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