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집트역사, 국립중앙박물관, 수학, 의학, 피라미드, 스핑크스, 미라, 람세스왕, 투탕카멘, 황금, 파라오, 마네토, 나르메르, 힉소스, 아시리아, 신왕국, 클레오파트라, 고대유적

2 years ago
1

고대 이집트 문명이 하필 거기서 발달한 데에는 나일 강의 특성이 크게 기인했는데, 정기적으로 범람한다는 것이다. 강이 가끔 범람한다는 것이야 비가 많이 오면 당연히 있을 수 있는 전혀 특별한 일이 아니지만 나일강은 '정기적'이라는 것이 중요하다. 범람의 이유는 청나일강 상류 에티오피아 고원지대에 5월에 내리는 계절성 폭우 때문인데, 이런 범람은 9~10월쯤에 나일강 하류 이집트에 도달해 영양소가 풍부한 부엽토, 부식토를 하류 이집트에 가득 옮겨주고 홍수에 잠겼다가 11월쯤부터 다시 드러난 땅은 지력이 매우 높아진다. 이처럼 나일강의 범람시기는 예측이 가능하므로 사람이 사는 곳은 물이 많아져도 닿지 않는 안전한 곳에 만들고, 강물로 인해 잠겨있던 땅에 농사를 지으면 작물이 잘 자라게 된다. 7월에 작물을 수확하면 10월에 다시 홍수가 와서 지력을 보충해주었다. 이처럼 고대 이집트는 농경사회를 이어나가기에 좋은 환경에서 시작되었다.

언제부터 고대 이집트의 역사가 시작되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약 6천 년 정도 전(대략 기원전 36세기)부터 상이집트, 하이집트[1]로 나뉜 국가가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 이집트의 역사가 얼마나 유구한지를 언급할 때 바로 이 시대가 인용된다. 즉 아직 북유럽 끝자락에 매머드가 남아있을 때, 이집트에서는 파라오가 등장하였다.[2] 2016년도에는 지금으로부터 무려 7300년 전, 기원전 5316년 무렵의 도시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기사 참고 청동기 시대 원시인 외치가 태어나기 2000년도 전에 이집트에선 이미 도시 문명이 등장하였다.

기원전 3100년 무렵에 처음으로 통일된 이집트가 되었다. 기원전 3세기 이집트 역사가 마네토가 쓴 기록에 의하면 메네스가 제1왕조를 창시하면서 상이집트와 하이집트를 통일하였다. 한국인들에게 있어 단군처럼 이집트인들에게는 메네스가 시조로 여겨진다. 다만 유적 발굴조사에 의하면, 이집트 제1왕조의 초대 파라오는 나르메르란 인물인데 이 인물이 메네스와 동일인물인지는 확실치 않다.(혹은 나르메르의 아들이란 설도 있다.) 이후 널리 알려진 이집트 문명이 발달하여 당시의 기술력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토목기술과 의학, 예술 등이 발달하였고, 세계에서 처음으로 발효된 빵과 오븐을 만들었으며, 히에로글리프도 이때 만들어졌다. 피라미드 역시 빼놓을 수 없다.[3]

고대 이집트의 통일 왕조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는데, 처음 통일된 시기부터 왕국이 혼란에 빠지는 기원전 2200년 즈음까지 고왕국 시대, 혼란이 수습된 이후부터 힉소스인에게 정복당할 때까지의 중왕국 시대, 그리고 힉소스로부터 독립한 후 아시리아에 정복당할 때까지의 신왕국 시대이다. 이게 얼마나 기냐면 각각의 기간과 간극은 대략 삼국시대, 고려시대, 조선시대보다도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데도 기원전이 안 끝난다. 피라미드가 처음 건립된 시기부터 클레오파트라 7세가 있던 시기 사이 간격보다 클레오파트라가 있던 시기와 iPhone이 출시된 시기 간격이 더 짧다.

고대 로마 시절 로마인들에게도 피라미드는 이미 고대 유적 취급 받았고 그 시절에도 이미 관광코스였다.[4] 콜로세움이나 판테온 등, 로마인들이 남긴 건축물들도 현대인들에겐 고대 유적으로 취급 받는 걸 보면 얼마나 그 간격이 긴지 알 수 있다.[5]

유구한 역사 만큼 인류 역사에서 최강의 자리를 가장 오래동안 유지했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 문명 성립 이후부터 역사를 계산할 경우 이집트가 인류 최강의 문명집단이었던 시간이 그렇지 않았던 시기보다 더 길다.[6]

참고로 고대 이집트와 현재 이집트 주민이 유전적으로 다르다는 주장이 있는데, 이집트에서 발굴된 미라에서 검출한 DNA를 다른 지역 고대인들의 DNA와 비교해 보면 사하라 이남 지역보다는 레반트 지역 주민들과 유사하다고 한다. 현재 이집트인의 DNA를 고대 미라의 것과 비교해 보면 현대 이집트인의 DNA에는 알렉산드로스 대왕이나 로마의 침입을 거치면서도 고대 미라들에서는 거의 나타나지 않던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의 영향이 15~25% 정도 나타난다고 한다. 크라우스 박사팀에 의하면 이는 나일 강 유역에서 노예 무역을 포함하여 상호 교역을 많이 했기 때문이거나, 중세에 이슬람이 사하라 남쪽으로 확산되면서 사하라 이남 지역과 접촉한 결과인 듯하다.# 사실 너무나 당연하고 새삼스러울 것도 없는 사실인 것이, 역사가 시작되던 무렵의 혈통을 현대까지 있는 그대로 쭉 유지해오고 있는 집단은 고립된 원시부족 말고는 없다.
3. 연표[편집]
3.1. 선사시대 ~ 통일 이전[편집]
선사시대에 이르면서 급격히 오른 기온에 따라 오늘날 사하라 사막 지방의 기후는 변하기 시작했다. 빙하기 때까지 사막이었던 사하라 일대는 BC 10000년 즈음부터 풀과 키 작은 관목으로 뒤덮히기 시작했고, 인간이 살기에 적합한 기후가 되면서 북아프리카의 생활 영역이 넓어졌다. 그러나 사하라 사바나는 지구 자전축 등의 변화와 BC 6000~5000년 전 있었던 급격한 기온 하강으로 다시 사막화가 진행되었다.[7] 그리고 이 사막화의 피난자들이 이집트와 오리엔트 문명의 건설자라는 설이 20세기 후반 이후 꽤 지지를 받고 있다.

이미 기원전 4400년경부터 나일계곡에서는 초기 문명의 유물들이 발견된다. 가령 대규모 원정이 시행되었음을 암시하는 정복자의 기념물이라든가, 귀족의 것으로 보이는 화장용 파레트, 무기 등이 그것이다. 이 시기의 문화는 '나카다 문화(Naqada culture)' 라고 부르는데, 4기까지 이르는 나카다 문화 끄트머리에서 이미 이집트 상형문자의 전신으로 보이는 원시적인 기호들이 등장하기 시작한다(게르제 문화(Gerzean), 나카다 제2기 - 기원전 3500년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그리고 2016년에는 카이로에서 남쪽으로 약 450km 거리의 소하그 지방 나일강 유역에서 기원전 5316년쯤 선왕조 때의 것으로 추정되는 고대도시와 고분을 발견했다고 했다.#

이집트 땅에는 통일 직전에는 크게 상, 하 이집트의 두 왕국이 존재했으며 왕국 안에는 30여 개의 도시국가들이 저마다 성벽을 두르며 사실상의 자치를 누리며 살았다. 그러던 것을 통합한 것이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라는 인물로 그가 이집트를 통합함으로써 비로소 이집트 왕조가 시작되었다고 본다. 그런데 그게 기원전 3100년경[8]의 일이다.
3.2. 고왕국 시대 (기원전 32~22세기/제1~6왕조)[편집]
통일 이후 약 천 년간을 고왕국 시대라고 하며, 피라미드가 등장하지 않는 전기 500년의 제1, 제2왕조는 초기왕조라고 구분하기도 한다. 이집트를 통일하고 고왕국을 세운 것은 나르메르 혹은 메네스인데, 전갈모양 표식 외에 이름을 알 수 없는 왕의 아들이라는 말이 있다. 나르메르와 메네스는 오늘날 이집트 역사가들에게 동일 인물로 거의 확정받고 있으나 나르메르와 메네스가 부자지간이었다는 설도 있다. 즉 스콜피온 킹(혹은 카) - 나르메르 - 메네스(=호르아하) 이런 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 혹은 스콜피온 킹 - 나르메르(=메네스) 이런 식의 계보가 이어지는 순인데 현대 이집트 역사가들은 후자 쪽을 더 신뢰하고 있다. 이후 1왕조의 마지막 왕인 제트(Djet)가 구리 확보를 위해 시나이반도로 원정을 떠나는 등 왕국의 체계를 갖춘다. 수도는 아비도스.

고왕국 시대에는 수도는 멤피스였으며, 상하 이집트를 모두 다스리는 왕은 신으로서의 절대적인 권위를 누리며 여러 거대 피라미드와 스핑크스를 건설했다. 이는 제3왕조 때 시작해 제4왕조에서 정점을 기록했다. 행정이나 예술 등의 면에서도 큰 발전이 있었으며, 누비아 등에 군사원정을 벌이기도 했다. 이 시기의 역사유적으로 유명한 것이 피라미드로, 가장 유명한 쿠푸왕의 피라미드가 기원전 2550년쯤에 지어졌다고 추측하고 있다. 이 시기 동아시아는 아직 청동기시대에조차 진입하지 못하였다.
3.2.1. 제 1 왕조[편집]
계보는 나르메르-호르아하-제르-제트-덴-아네지브-세메르케트-카(Qa'a) 순이다.[9]

제르의 경우 무덤에서 비석과 미이라등의 유물이 발견되었는데 미이라는 지금 현존하지 않는다.[10]
3.2.2. 제 2 왕조[편집]
마지막 왕인 카세켐위를 제외하고는 자료의 부족으로 족보를 정확히 알 수 없다.

2왕조 7번째 왕인 세트페리브센 시대에 이집트 상형문자는 문장을 표현하게 된다.
3.2.3. 제 3 왕조[편집]
피라미드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기이다. 이전의 파라오들은 마스타바형식의 무덤에 묻혔다면, 이때부터는 계단식 피라미드부터 시작해서 피라미드라는 건축물의 가능성을 시험해보는 시기라고 할 수 있다. 파라오들 중에는 후니의 피라미드가 가장 많다. 마지막 왕 후니에게 후사가 없어 서출이었던 친척 스네프루(Snefru)에게 왕위가 돌아감으로서 4왕조가 시작된다.
3.2.4. 제 4 왕조[편집]
쿠푸왕이 있던 시기이다. 유명한 파라오들의 피라미드가 많다.
3.2.5. 제 5 왕조[편집]
3.3. 제1중간기 (기원전 22~21세기/제7~10왕조)[편집]
제6왕조 시기에 이집트는 페피 1세와 페피 2세의 지나친 장수에 따라[11] 후계구도와 왕의 권위가 무너지고 각 지방의 총독들이 할거하며 내전을 벌이는 급격한 혼란에 빠지게 되는데, 그 이유는 분명하지 않다. 유력한 설명 중 하나는 갑작스러운 가뭄으로 나일강의 수위가 낮아지면서 기근이 닥쳤다는 것이다. 이 시기를 제1중간기라고 부른다. 로마의 군인황제시대 저리가라로, 70일간 70명의 파라오[12], 146년간 27명의 파라오가 설쳤다.[13]제9, 제10왕조는 헤라클레오폴리스를 중심으로 그 주변만을 지배했다.
3.4. 중왕국 시대 (기원전 21~18세기/제11~12왕조)[편집]
약 140년간의 제1중간기의 혼란이 수습된 것은 제11왕조 시기로, 멘투호테프 2세의 통일 성공 이후 이때부터를 중왕국으로 분류한다. 중왕국 시기의 수도는 멤피스보다 상당히 상류에 있는 테베(오늘날 룩소르Luxor)로[14], 이 시기에는 파라오는 아메넴헤트 1세 이후로는 세누스레트(Senusret)라는 이름을 물려 사용했으며(1세 ~ 3세)[15], 고왕국 시대에 비해 상대적으로 인간에 가까워졌으며 아몬라(아몬 + 라) 신앙을 바탕으로 사제 계급의 힘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Loadin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