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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years ago

중국 소설 전공자 21명의 재치 넘치는 입말을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곳부터 조금은 생소한 곳까지 중화권의 명소들에 얽힌 이야기를 다채롭게 들려준다. 발굴한 지 50년이 가까워지는데도 그 규모조차 알 수 없는 진시황릉, 여러 나라의 사신들이 교류한 자금성, 작은 항구에서 아시아의 금융 중심지로 성장한 상하이, 관광과 쇼핑의 천국 홍콩의 혼란스런 현실 등 중국의 어제와 오늘을 보여준다. 또한 하얼빈의 거리를 거닌 이효석, 마카오와 각별한 인연을 맺은 김대건 신부, 대만의 지룽항에서 일본 경찰에 체포된 신채호 등의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을 뛰어넘어 생각의 폭을 넓혀준다.
목차
•서문

01 이효석이 사랑한 거리 _하얼빈 중앙대가│유수민
02 ‘치욕’의 삼궤구고두례를 연습하다 _자금성 습례정│김민호
03 중국 속의 작은 유럽 _칭다오 팔대관│박현곤
04 쌀과 소금의 저잣거리 _양저우 동관가│김수현
05 군자는 문덕교를 건너지 않는다 _난징 진회하│이민숙
06 지옥 위에 세워진 천국 _상하이 라오마터우│정민경
07 우리 사랑해도 될까요 _항저우 뇌봉탑│김명구
08 왕희지의 붓끝 서린 풍류지 _샤오싱 난정│천대진
09 이민자의 유토피아 _푸젠 토루│이유라
10 희미한 옛 식민지의 그림자 _대만 지룽과 지우펀│민경욱
11 자소녀 이야기 _광둥 주강 삼각주│이주해
12 혼혈의 땅, 아시아의 샐러드 볼 _홍콩 침사추이│임대근
13 낯선 도시에서 조선인을 만나다 _마카오 성 안토니오 성당│최형섭
14 움직이는 누각, 시대를 그리다 _후베이 황학루│이현서
15 무협은 살아 있다 _숭산 소림사│김명신
16 석벽에 새긴 욕망 _뤄양 용문석굴│전주현
17 수은이 흐르는 지하 왕궁 _시안 진시황릉│송정화
18 전쟁의 포화 속에 불꽃처럼 _충칭 산성보도│이윤희
19 지친 시인을 품은 풍요의 땅 _청두 두보초당│송진영
20 당나라 공주, 티베트의 여신이 되다 _라싸 조캉사원│이연희
21 기약 없는 구도의 길 _둔황 양관│정광훈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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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에서
1930년대 조선인에게 하얼빈을 포함한 만주의 도시들은 일제의 계획 아래 관광지로 소비되었다. 만주는 조선 학생들의 수학여행지로 특히 인기 있었다. 이광수, 이태준, 함대훈, 김관 등 많은 문인과 예술가들이 만주를 관광한 후 글을 남겼다. 러시아 문학을 전공한 함대훈은 ‘모데른’ 카페에서 여급에게 러시아어로 차를 주문한 뒤 ‘어쩐지 가슴이 울렁거린다’고 했고, 음악평론가 김관은 ‘하르빈에서 볼 수 있는 숭가리(쑹화 강) 빙상의 세례제’를 ‘세계의 명물’로 꼽았다. 동시대 작가 이효석에게 하얼빈은 다소 다른 맥락에서 특별한 도시였다. 향토소설 ?메밀꽃 필 무렵?으로 알려져 있는 그는 사실 구라파(유럽)를 동경한 ‘모던 보이’였다. 그는 ‘백계 로인(러시아인)들의 생활에 비상한 흥미를 가지고 있었고 이 흥미는 쌓이고 쌓여’ 1939년 여름과 1940년 초에 하얼빈을 두 차례 방문한다. [01 이효석이 사랑한 거리]에서 접기
정오가 되면 빡빡머리 소년이 “꽃이요, 꽃! 재스민 꽃을 팝니다!”라고 외쳐대면서 꽃과 향수를 팔러 다닌다. 기녀들은 주렴을 걷고서 앞다투어 꽃과 향수를 산 뒤 자신을 꾸민다. 그러고는 잠시 뒤 백옥 같은 기녀들이 속이 비치는 하늘하늘한 옷을 걸치고, 머리에 재스민 꽃을 꽂은 채 모습을 드러낸다. 기녀들의 진한 화장 내음과 재스민 향이 강남공원으로 퍼지면 응시생의 마음은 여지없이 무너져 내린다. 시험공부로 인한 스트레스, 과거 시험장의 열악한 환경, 합격 소식을 기다리고 있을 가족 생각으로 응시생들은 마음고생이 여간 아니다. 그런데 진회하의 아름다운 풍광과 꽃같이 아름다운 기녀들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니, 어찌 문덕교를 건너 진회하의 기루로 달려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또한 청운의 꿈을 품고 과거를 보러 온 응시생이 어찌 쉽게 이 다리를 건널 수 있겠는가! ‘군자는 다리를 건너지 않는다. 다리를 건너면 군자가 아니다’라는 말에서 이러저러지도 못하는 응시생들의 당혹감이 엿보인다. 문덕교는 응시생들의 마지막 이성의 끈이자 욕망의 경계를 넘어가는 지표였다. [05 군자는 문덕교를 건너지 않는다]에서 접기
객가를 생각하면 ‘변화’라는 단어가 떠오른다. 그들은 고향을 등지고 중원에서 변방으로 거주지를 바꿨고, 한족이지만 더 이상 한족으로 불리지 않으면서 객가라는 새로운 이름을 얻었다. 나아가 중국을 떠나 화교라는 이름으로 활동 무대를 확장했다. 중국에는 많은 민족이 있지만 변화라는 단어가 이만큼 어울리는 민족이 또 있을까. 그들이 새로운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고 실행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정주할 수 없고 이주해야만 했던 환경 때문일 것이다. 유교적 예교 문화에서 조상 대대로 살아온 고향을 떠난다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이동 수단이 지금처럼 편리하지 않아 한평생을 태어난 곳에서만 살다 가는 사람이 태반이었던 시대에 감히 고향을 버리고 오랑캐의 땅으로 옮겨가 살겠다는 생각은 어쩌면 이단이나 혁명에 가까운 것이었으리라. 주어진 가치와 고정된 삶의 방식에 매달리지 않고 자신을 바꿔가는 것, 그것은 노마드적 정신에 가닿는다. [09 이민자의 유토피아]에서 접기
광둥의 여인들이 자주적으로 삶을 결정하면서 비혼을 선언하게 된 데는 자본주의의 발달이라는 배경이 크게 작용했다. 일찍이 당나라 때부터 바다를 통한 대외무역의 거점지로 자리잡아온 광둥의 도시들은 명말 청초에 이르러 내륙 지역보다 더 빠른 속도로 자본주의를 싹틔우기 시작했다. 이와 보무를 맞추어 여성들에게도 돈 벌 기회가 생기기 시작했으니, 그것은 바로 주강 삼각주 일대의 양잠업의 발달이었다. 비옥한 땅과 고온 다습한 날씨는 여인들이 뽕나무를 키우고 누에를 치기에 더없이 좋은 조건을 제공했다. 옛날 궁궐에서 왕비들이 친잠례를 올려 누에 치고 비단 생산하는 일이 여인들의 영역임을 천명했듯, 예로부터 양잠업은 여인들의 몫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끊임없이 격동하던 땅 광둥에서, 누에 치고 비단 짜서 경제력을 얻은 여인들은 이제 또 다른 세상을 꿈꾸기 시작했다. [11 자소녀 이야기]에서 접기
평생 궁핍함과 번민으로 심신이 지쳤던 시인은 풍요롭고 여유로운 금관성, 청두의 품속에서는 마음 편히 쉴 수 있었다. 이런 의미에서 두보가 한적?담백?우아한 시를 이곳에서 창작할 수 있었던 것은 전적으로 청두의 자연과 기질, 인문 환경에서 기인했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즐기며 물아일체의 경지를 노래한 생태 시인이 되었고, 소박한 삶과 자연 친화적인 가치를 소중히 여기는 청두인의 생활 태도를 잘 반영한 인물로 받아들여지게 된 것이다. 물론 이것은 출신과 상관없이 자신들의 소중한 가치를 공유한 시인을 우리로 받아들이는 청두의 넉넉한 포용력 덕분임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19 지친 시인을 품은 풍요의 땅]에서
하얼빈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것은 석기 시대 말인 기원전 2200년경부터이다.

하얼빈의 상당한 지역은 본래 부여에 속하였으며 이를 고구려와 발해가 이어받았다. 발해는 이지역에 막힐부를 설치했다.

발해가 멸망한 뒤에 생여진이 발해의 옛땅이 있던 지린성과 헤이룽장성일대에 정착했는데, 이들중 훗날에 금나라를 세우게 되는 완안부가 이지역의 아청 구에 거점을 두고 있었다. 이 거점은 훗날 상경 회령부로 격상되어 금나라의 수도 역할을 했으나, 금나라가 중도로 수도를 옮기면서 버려졌다.

본격적으로 도시가 건설된 것은 1898년 러시아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를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연장하는 동청철도를 건설하면서였다.

러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하고 그 영향력이 줄면서 미국, 독일, 프랑스 등의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16개 나라의 영사관이 개설되고, 수백 개의 공장과 기업, 은행이 세워지면서 만주의 중심 도시로 성장하게 되었다.

1909년 10월 26일 안중근 의사가 항일 운동 목적으로 하얼빈역에서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를 사살한 곳으로도 많이 알려져 있다.

1918년 러시아 내전에서 패한 러시아 백군이 이 도시로 피난오면서 러시아 바깥에서 가장 큰 러시아인 사회가 형성되었다. 동시에 러시아 출신의 유대인 공동체도 만들어졌다. 러시아식 학교와 러시아어 신문도 발행되었다.

1935년 둥칭철도가 일본에게 팔린 후, 그리고 1946년 이후 러시아인은 대부분 소비에트 연방으로 되돌아갔다. 다른 유럽인들도 오스트레일리아나 브라질, 미국으로 다시 이민 가거나 자신들의 모국으로 되돌아 갔다. 1988년까지 하얼빈에 남아 있던 러시아인은 나이든 30여 명뿐이었다.

만주국이 세워지면서 일본군은 1932년 2월 4일부터 하얼빈에 진주하였지만, 1945년 8월 20일에는 소련군이 하얼빈을 점령했다. 하얼빈은 중국인민해방군에게 1946년 4월에 통치권이 넘어갔다.

경제

하얼빈 역
다롄은 지역의 선적 중심지로, 선양은 금융 중심지로 여겨지는 동안, 하얼빈은 지역의 무역과 쇼핑 중심지가 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도시는 세계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지역 중 하나에 위치해 있고 천연 자원의 풍부함, 편리한 교통 시스템, 인력 자원의 풍부함 등 수많은 이점들을 자랑한다.

2013년 하얼빈의 GDP는 5010억 8천만 위안(817억 달러)로 예년보다 8.9%증가하였다. 3차 산업의 생산량은 GDP에서 가장 큰 부문을 유지하였고 2674억 3천만 위안(205억 달러)로 예년보다 9.0% 증가하였다. 수출과 수입의 총량은 2012년 말 53억 3천만 달러를 기록했다.

하얼빈의 토양은 초르노젬으로 불리며 중국에서 가장 영양이 풍부하며 식량과 직물 관련 농작물을 재배하는 곳이다. 즉 하얼빈은 중국 곡물 생산의 기반이며, 농업 원료의 공급에 이상적인 위치에 자리 잡고 있다. 포괄적인 산업 시스템을 통해 섬유, 제약, 식료품, 자동차, 야금, 전자, 건축 재료와 화학과 같은 경공업을 돕고 있다. 또한 '전력 발전의 수도'로 알려져 있으며 이곳에 설치된 수력과 지열 발전 설비는 중국 전체에 설치된 총 용량의 3분의 1을 차지한다.

외국인 투자는 오름세를 보이고 있다. 하얼빈 경제무역박람회는 17년 동안 해마다 개최되었고 누적 출품자 및 방문자 수가 130만 명을 넘어섰다. 외국인 직접 투자는 여전히 적은 편이지만 정부의 노력의 결과 점차 증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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