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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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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 이름의 어원은 이집트어로 '~의 자식'라는 뜻의 msy 로 본다. 파라오 중에는 신의 이름을 붙여 토트의 자식이라는 의미의 투트모세나 라의 자식이라는 의미의 람세스라는 이름을 가진 경우가 있다.[5] 타나크에서 모세를 적는 방식에 기인해 물의 자식, 즉 나일강의 자식(mw-š)이라는 의미를 가진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6] 그러나 당대 m-š-h의 히브리어 발음과 msy의 이집트어 발음이 서로 닮지 않았다며 이집트 어원론 자체에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도 존재한다.[7]

출애굽기에서는 모세의 이름이 지어진 경위에 대해 설명한다.[5][8] 파라오의 딸이 모세를 물에서 건져냈다며 '건져냄'(히브리어: מְשִׁיתִֽהוּ)의 히브리어에 따와 '모세'(히브리어: מֹשֶׁה)라 지었다는 것이다.[9][10] 유대교에서는 '건져짐'이 아니라 '건져냄'이 그 어원임에 착안하여 이 이름이 모세가 후에 유대인을 이집트에서 탈출시킬 것을 미리 예지하는 이름으로 보기도 한다.[11][12]

이를 모세의 이집트 어원을 히브리어 어원으로 교체하려는 시도로 보기도 한다.[12] 필론과 요세푸스는 모세의 이름이 이집트어 기원을 가졌을 가능성을 발견한다. 필론은 모세의 이름이 콥트어로 '물'(μῶυ)에서 기원했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13] 중세 유대교 학자들은 어찌 파라오의 딸이 그 이름을 히브리어로 지을 수 있겠느냐고 의문을 제기한다. 파라오의 딸이 유대교로 개종했거나 요게벳이 그 이름을 짓는데 관여했다고 보기도 한다.[14][15]

성경의 기록

파라오 앞의 모세. 6세기 경 시리아어 사본.
출생
출애굽기에 따르면 이집트의 총리 였던 요셉을 모르는 파라오가 즉위하자 파라오는 당시 고센 땅에서만 살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의 엄청난 인구가 왕권을 위태하게 할까 두려워 이스라엘 백생들을 혹독하게 부렸다. 그들은 흙을 이겨 벽돌을 만드는 일과 밭일 등 온갖 고된 일을 시키면서 이스라엘 백성을 괴롭혔다. 한편 파라오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인구가 줄지 않자 히브리 산파(한 사람은 시브라였고 또 한 사람은 부아였다)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히브리 여인이 해산하는 것을 도와줄 때에, 사타구니를 보고 아들이거든 죽여버리고 딸이거든 살려두어라." 그러나 산파들은 파라오가 하라는 대로 하지 않고 사내아이들을 살려주었고, 파라오가 그들을 꾸짖으면 '히브리 여인은 기운이 좋아 산파가 가기 전에 아기를 낳아 버린다.'며 둘러댔다. 그러자 파라오는 이집트의 군대에게"히브리인들이 계집아이를 낳으면 살려두되 사내아이를 낳으면 모두 강물에 집어넣어라."라고 명령했다.[16] 이때 태어난 사람이 모세이다. 모세는 어머니와 누나 미리암의 기지로 겨우 살아남았다. 아기를 더 숨겨둘 수 없게 되자 갈대상자를 얻어다가 역청과 나무진을 바르고 그 속에 아기를 뉘어 강가 갈대 숲 속에 놓아두었는데, 마침 파라오의 딸이 강에 목욕하러 왔다. 공주는 아기를 보자 측은지심이 들어 키우고자 했다. 숨어서 이 광경을 보던 누나 미리암의 제안으로 히브리인인 모세의 어미가 유모 일을 하게 되었다. 공주는 모세를 양자로 삼았고, 강에서 건진 아이라는 뜻으로 모세라고 이름도 지어주었다.

모세의 미디안 생활
40세가 된 모세는 동족인 이스라엘 민족이 심한 노역을 당하는 모습을 보고는 감독을 죽였다. 이 후 이집트와 가나안의 중간 지대인 미디안으로 피신한다. 망명자가 된 그는 미디안 종교의 사제인 이드로의 딸과 결혼한다.[17] 저절로 불이 타오르는 초자연현상(엘모의 불)을 계기로 야훼를 만난 그는 민족을 구원하라는 명령에 따른다.[18][19] 파라오가 노동력 손실을 우려하여 해방요구를 거부하자 모세는 신의 계시를 받고 초자연적인 10가지 재앙을 일으켜 굴복시킨다. 야훼의 도움으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들은 갈대 바다를 건너 이집트를 탈출한다.[20]

광야 생활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는 불평불만이 심한 백성들과 논쟁을 벌이며, 광야생활을 해야 했다. 하지만 이들의 불평은 그치지 않았고, 그때마다 야훼는 만나 등을 내려주며 야훼 공동체가 실천해야 할 율법을 익히게 하였다.[21] 모세는 가나안에 들어가지는 못했는데, 모세가 해야 할 일은 민족을 구원하는 일이었지 가나안 입성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가나안의 입성은 후계자 여호수아가 이루어냈다.

십계명
연속 기획:
십계명
MCC-31231 Mozes toont de wetstafelen (1).tif
나는 너희 하나님이라
① 나 외에는 위하는 신들을
네게 있게 말지니라
② 자기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
③ 너의 하나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지 말라
④ 안식일을 지켜 거룩하게 하라
⑤ 네 부모를 공경하라
⑥ 살인하지 말지니라
⑦ 간음하지 말지니라
⑧ 도적질하지 말지니라
⑨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지니라
⑩ 탐내지 말지니라
관련 항목
돌판 (출 34:1)
의식법 십계명 (출 34:11-26)
하나님의 손가락 (출 8:19)
모세
계약의 궤 (히 9:4)
가톨릭 신학
vte
이집트에서 탈출한 모세와 이스라엘 민족은 40년간 사막을 여행했으며, 십계명을 야훼로부터 받았다. 물론 모세가 받은 십계명은 처음부터 열 가지 계명으로 분류되어 있지 않았으므로 기독교 교파마다 계명의 분류가 다르다. 루터교와 로마 가톨릭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1계명과 2계명이 분리되어 있지 않지만, 성공회와 개신교에서 사용하는 십계명은 분리되어 있다.

모세의 저작
모세는 모세오경(창세기,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 신명기)을 기술했다고 알려졌다. 하지만 신명기 34장에 그의 죽음에 대해 언급되어 있는[22]것 등을 이유로 모세오경의 모세저작설을 부정하는 학자들이 있다. 그러나 신명기 1장 1절[23]은 신명기의 저자가 모세임을 밝혀 주는 암시가 있다. 문서설에 따르면 신명기의 원저자는 모세이나, 모세가 죽은 후에 모세의 죽음에 대한 신명기의 기사를 모세의 후손들이 첨가했다고 본다.
프랑스(1910-1914)
1910년에 샤갈은 파리로 자신만의 예술적 스타일을 발전시키기 위해 갔다. 예술사학자이자 큐레이터인 제임스 스위니는 샤갈이 처음에 파리에 도착했을 때, 입체파(Cubism)가 지배적인 예술 형태였으며, 프랑스의 예술은 여전히 19세기의 물질주의적 외관에 지배되고 있었다고 기술하고 있다. 하지만 이미 러시아에서 잘익은 색채 재능과 신선하고, 감성에 대담한 반응과 단순한 시에 대한 느낌과 유머를 갖춘 채 파리에 도착했다고 밝혔다. 이러한 개념은 당시 파리에는 낯선 것이었으며, 결과적으로 그의 처음의 인식은 다른 예술가들에게서 온 것이 아니라 볼레즈 상드라르나 기욤 아폴리네르와 같은 시인들에게서 온 것이었다.[7] 예술사학자 장 레이마리는 샤갈이 예술에 대한 생각을 내적 존재에서 외부로 나온 것이며, 보이는 사물에서 육체적 결과물로 나온 것이라는 것을 관찰했다. 그리고 그것은 입체파의 창조법과는 상반되는 것이었다.[8]

그래서 그는 기욤 아폴리네르와 로베르 들로네, 페르낭 레제와 같은 다른 아방가르드 유명 인사들과 친교를 가졌다. 빛의 도시이자 무엇보다 자유의 도시에서 샤갈의 파리의 꿈이 이루어졌다.[4] 23세의 젊은 샤갈에게 닥쳐온 최초의 역경은 대도시 속에 외로움과 프랑스어를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얼마간은 그는 다시 러시아로 돌아갈 고민도 했으며, 그림을 그리면서도 러시아 민속의 풍부함과 유대인으로서의 경험, 가족 그리고 특히 벨라를 꿈꾸기도 했다.

파리에서 우수한 화가들이 가르치는 〈라 팔레트〉(La Palette)에 등록을 했으며, 또한 다른 아카데미에서도 작품들을 찾기도 했다. 그는 여유 시간이 있으며, 갤러리나 살롱, 그리고 특히 루브르에서 공부를 했으며, 그곳에서는 렘브란트, 르넹 형제, 샤르댕, 반 고흐, 르노와르, 피사로, 마티스, 폴 고갱, 쿠르베, 밀레, 마네, 모네, 들라크루와 그리고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공부했다. 그가 종종 러시아 장면을 그리는데 사용한 구와슈 기법을 배운 곳도 파리였다. 그는 또한 몽마르뜨와 카르티에 라탱(Latin Quarter)을 종종 방문을 했고, 파리지엥으로 숨쉬는 것을 행복해 했다.[4]

러시아 (1914–1922)
그는 비테프스크에 남아있는 약혼녀 벨라를 그리워했기 때문에, 그녀를 항상 생각하고는 그녀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그리하여 그는 베를린에 있는 유명한 예술 딜러의 작품 전시 초대를 받아들이기로 결심한다. 1913년 9월 베를린에서 개인전시회를 열어 《내 약혼녀에게》, 《골고다》, 《러시아, 암소 그리고 다른 것들에게》를 전시하여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14년 6월 허바스 발덴 스트름 갤러리(Herwarth Walden's Sturm gallery)에서 작품을 선보이고 이곳에서 성공으로 인해, 베를린으로 와서 화가로서 자리를 굳히게 된다. 이 전시회는 대단히 성공적이었고, 독일 평론가들은 그를 호평했다.[4]

전시회가 끝난 후 1914년 러시아로 가서 벨라와 결혼을 위해, 비테브스크에 머물게 된다. 그러나 몇 주 후에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여, 러시아의 국경이 봉쇄되어 버린다. 1915년 벨라와 결혼을 하고, 그해 첫 딸 이다를 가진다. 결혼 전 샤갈은 부유한 유대인 브르주아인 그녀의 부모님을 설득하기 위해 애를 먹었다. 그녀의 부모는 가난뱅이 출신의 화가가 그들의 딸을 부양할 수 있을 지를 염려하였다. 하지만 결혼으로 인해 전쟁 중임에도 불구하고 샤갈의 정신은 대단히 고양되었다. 이 당시의 그림에는 몽환적인 젊은 연인들을 화폭에 담고 있다.
1917년 10월 혁명은 샤갈에게 기회를 가져다 주기는 했지만, 위험한 시기였다. 당시 그는 가장 저명한 예술가 중 한 사람이었고, 모더니스트 아방가르드의 멤버 중 한사람이었다. 이것은 혁명의 미적 무장으로서의 위엄과 특권을 즐기는 것이기도 하였다.[2] 그 후 러시아에 잠깐 살다가 1922년 고향을 포기하고 베를린을 통해 1923년 그녀와 함께 파리로 돌아온다.
이어 그는 야수파의 색채를 자기 나름대로 이용하여 아름답고 아담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제1차 세계 대전이 일어나자, 고국으로 돌아와 8년간 우울하게 보내다가, 1922년 베를린을 거쳐 파리로 돌아와서 프랑스에 귀화하였다. 선명한 색채로 사람과 동물을 섞어, 환상적이며 신비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면서부터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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