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 묵점 기세춘선생과 함께하는, 서양, 존재론, 철학사, 묵적, 시간론, 생로병사, 시간, 대우주, 영원 철학자, 과학자, 경제학자, 반전 평화운동가, 혁명가, 반석, 평등사회

2 years ago

묵자는 초나라와 월나라 등 여러 곳에서 봉토를 주겠다고 하며 초빙을 받았으나 귀족의 신분이 되는 것을 거절하고 노동자의 검은 옷을 입고 전쟁 반대 운동에 목숨을 걸었으며 평등사회 건설을 위한 사회운동에 평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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묵자는 철학자이며, 과학자요, 경제학자요, 반전 평화운동가였으나 그보다 혁명가라고 해야 옳을 것 같다. 그는 실천하고 조직하고 투쟁한 사회혁명가였다. 그는 “내 말은 반석과 같으니 깨뜨릴 수 없다”고 외치며 “의를 위해 목숨을 버리라”고 요구했다.

공자와 묵자는 보수 진보의 쌍벽이었으므로 서로 비난했다. 그러므로 일찍이 공자의 도통인 한유韓愈는 공자의 진면목을 알기 위해서는 반드시 묵자를 알아야 한다고 말했다. 한쪽 벽만 보고는 골짜기를 다 안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묵가들은 유가들의 지혜가 갓난아기보다 못하다고 조롱했으며, 고대 삼대 폭군들이 모두 유가의 도를 따른 자들이었다고 비난했다. 또 유가들이야말로 생산 활동을 기피하고 게으르고 오만에 빠져, 먹고 마시는 것만 좋아하고 일하는 것은 싫어함으로써 굶주리고 추위에 떨며 얼어 죽고 굶어죽을 위험에 처해도 거기서 벗어날 수가 없는 존재라고 혹평했다.

반면 유가들은 평등을 주장하는 묵가들은 아비 없는 짐승 같은 자들이라고 비난하고, 공적과 실용을 숭상하고 검약을 장려하며 차등을 가볍게 보니, 천하를 통일하고 국가를 세우는 관건을 모른다고 비판했다. 또한 묵자는 공리功利를 숭상하고, 수고로운 노동을 하고 백성과 함께 사업에 종사하며, 성과를 균등 분배할 것이니, 천시天時와 지리地利와 인화人和를 잃게 되어 더욱 가난해지고 날마다 다툴 것이며, 죽도록 고생해도 더욱 공적은 적을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처럼 공묵은 서로 대립했으므로 한쪽만 읽으면 제대로 평가할 수 없고 아울러 읽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묵자』란 책은 당시 시대적 논점을 주제별로 논문 형식으로 논술하고 있어, 동시대의 문서인 제자와 문답 형식의『논어論語』나 강령적 단문 형식의『노자老子』의 문제의식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참고해야 한다.

묵자를 모르고 감히 진보를 말하는가?

· 노동운뾵의 시조
묵자는 인류 최초로 인간만이 노동을 하는 동물임을 발견한 사상가이다. 그는 짐승과 새들은 수놈이 밭 갈고 씨 뿌리지 않고 암놈이 실 잣고 길쌈을 하지 않아도 먹고 입을 것을 모두 하늘이 이미 마련해 주었지만, 오직 사람만은 다른 짐승들과는 달라 노동을 해야만 살아갈 수 있으며, 노동을 하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는 존재임을 천명했다. 노예나 소와 말과 개들의 사역은 노동이 아니다.

공자의 학문이 군주와 귀족 등 지배계급에 유세하여 관직에 나가 입신출세하려는 선비 계급을 위한 학문이었다면, 묵자는 공민 계급인 목수 출신이었으므로 그의 학문은 천대받던 노동자들과 헐벗고 굶주린 민중의 해방을 위한 학문이었다. 그래서 일찍이 순자荀子는 묵자를 ‘노동자의 도道’라고 말했다. 실제로 공자는 구체제인 주례周禮로의 복귀를 주장했으나 묵자는 신분차별과 사유재산제를 반대하고 인민 모두를 평등하고 두루 살리는 공산공생共産共生 공동체인 이른바 안생생安生生 대동사회를 지향했다.

· 인류 최초의 반전 평화운동가
그가 활동하던 때는 춘추전국시대로 400여 년 동안 전란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는 전쟁이야말로 하늘의 뜻에 반하는 악惡의 근원이며 평등공동체를 파괴하는 제1의 장애물로 생각했다. 그러므로 그는 침략전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 침략받는 나라에는 제자들을 보내 방어 임무를 맡게 하고 자신은 홀로 침략국 군주를 만나 전쟁 중지를 담판 지었다.

특히 묵자는 전쟁을 경제학적 소비제도로, 인류학적 문화제도로 고찰했다. 그는 백성이 궁핍한 것은 지배계급의 초과 소비의 낭비문화 때문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먹고 입고 따뜻하고 쓰기에 편리하면 그것으로 그치고 인민의 이용후생에 보탬이 되지 않는 것은 생산하지 말라고 했다. 재화는 본래의 목적대로 소비되어야 하며 그것을 초과하여 지배자들의 권력과시를 위해 사용되는 것은 노동의 목적을 일탈한 ‘초과 소비’라는 것이다. 유가들의 후장구상厚葬久喪(화려한 장례와 오랜 상례)을 비판한 것도 같은 이유다. 산 사람을 생매장하고 재물을 땅에 묻는 후한 장례(厚葬)와 노동 시간을 빼앗는 오랜 상례(久喪)는 초과 소비이며 인민을 착취하고 굶주리게 하는 악한 문화제도라는 것이다. 그에게는 전쟁도 이와 같은 초과 소비의 전형이었다. 전쟁은 지배계급의 사리사욕을 위한 것일 뿐 하늘의 백성을 죽이고 천하의 산업을 피폐하게 만드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사회계약설의 원조
묵자는 만민평등론 인민주권설 등을 주장한 민주적 정치사상가였다. 그는 평등의 정치는 의로운 것이며 차별의 정치는 폭력이라고 말했다. 그의 평등은 하늘에 뜻에 근원을 두는 천부인권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므로 신분, 빈부로 인해 차별받지 않는 기회의 평등이다. 그는 “사람은 어린이나 어른이나 귀하거나 천하거나 모두 똑같은 하느님의 신하”라고 말했다. 또한 “비록 농업이나 상공업에 종사하는 사람이더라도 능력이 있으면 그들을 관직에 등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자유로운 신분이동을 옹호하고 신분차별을 비판했다. 또한 그는 “천하의 의리를 화동 일치시키고자 어진 이를 선출하여 천자로 삼았다”고 했으며 “군주는 민중의 총의로 약속한 것”이라고 말했다. 백성이 주권자임을 분명히 말한 것이다. 여기서는 19세기 루소Jean­Jacques Rousseau가 말한 사회계약설의 소박한 원형을 볼 수 있으니 공자가 주장한 왕권 천명론에 비교하면 묵자가 얼마나 진보적이었나를 알 수 있다.

묵자는 재산의 상속과 사유제를 반대하기도 했다. 아마도 이것은 인류 역사상 처음일 것이다. 그리고 완전고용과 필요공급, 균분에도 관심을 가졌다. 이런 점으로 보아 묵자는 진보주의의 시조라고 해야 타당할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를 알려면 공자를 읽어야 하겠지만 진보의 진면목을 알려면 반드시 『묵자』를 읽어야 한다.

예수를 알려면 묵자의 하느님을 알아야 한다!
묵자는 군왕을 가치의 표준으로 인정하지 않고 천지天志 즉 하늘의 뜻을 유일한 가치표준으로 제시했다. 그리고 하느님의 뜻은 겸애와 교리交利라고 설명한다. 그의 반전론, 절용론, 공동체론, 기타 정치 · 경제사상 등이 모두 이리로 통한다.

『묵자』에서는 300여 차례나 하느님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묵자』 53편은 모두 일관되게 겸애와 교리라는 하느님 사상을 기초로 진술된 글이다. 이에 대해 기세춘 선생은 그 내용이 『신약성경』과 놀랍게도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리고 『구약성경』 · 『묵자』 · 『논어』 등이 거의 같은 시대에 기록된 문서라는 점에 주목한다. 이것들은 모두 수만 년 동안 발전해 온 인류 문명이 비로소 문자로 기록된 이른바 차축시대(axial age)의 인류적 문화유산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구약의 신 야훼는 전쟁신이고 부족신의 요소가 강한데 반해 묵자의 하느님은 평화와 민중해방의 신으로서 인류적 보편신이라는 점에서 5백년 후 예수의 신과 너무도 닮았다. 그리고 『묵자』는 2천 년 동안 금서였으므로 묵자의 하느님에 대한 증언은 정치권력이나 교단 권력에 의해 왜곡 변질될 객관적 요인이 없었다. 그러므로 외세와 지배 권력에 타협 혹은 복무하기 위하여 변질된 서양 예수를 본래의 모습으로 복원하기 위해서는 그에 앞선 묵자의 하느님이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예수가 말한 사랑과 평화의 하느님의 참 모습을 복원하기 위해서는 묵자의 하느님은 반드시 검토해야 할 대상이다.

천하에 남이란 없다!
‘천하무인天下無人’이란 묵자 사상을 한 마디로 표현한 핵심 강령과도 같다. 『묵자』에는 “천하무인만이 묵자의 말이며 오직 이것뿐이다”라고 단언하기도 한다. 그러면 천하무인이란 어떤 뜻인가? 천하에 사람이 없다는 공허한 말은 아닐 것이다. 그것은 ‘천하에 남이란 없다’ 즉 천하 만민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므로 남도 내 몸처럼 두루 사랑하라는 뜻이다.

이러한 묵자의 사랑은 예수의 사랑과 부처의 자비와도 비견된다. 그렇기에 중국의 국부 쑨원孫文 “고대에 사랑을 말한 사람으로 묵자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 묵자가 말한 겸애는 예수의 박애와 같은 것이다”라고 했다. 고 문익환 목사는 “묵자의 하느님은 예수의 하느님과 쌍둥이같이 닮았으며 석가, 묵자, 예수는 한 뿌리에서 나온 세 가지다”라고 했다.

그런데 오늘날 세계는 어떠한가? 지구촌 곳곳에서는 아직도 전쟁의 불꽃이 꺼지지 않고 있다. 민간인 희생도 불사한 무차별 미사일 공격을 단행하는가 하면 한편에서는 자살 폭탄테러로 맞선다. 텔레비전을 통해 우주인의 생활이 실시간 중계되는 시대임에도 아프리카에서는 수백만 명의 어린이가 굶어 죽어간다. 이것이 예수와 공자와 부처 또는 다른 신이나 이성을 믿는 우리의 이면인 것이다.

종교는 갈 곳을 잃었고, 풍요와 번영을 약속했던 자본주의 경제 체제는 약자의 고통을 양산했으며, 미국식 금융 자본주의의 꽃이라 했던 월스트리트로부터 시작된 진동은 세계 경제를 위기에 빠뜨렸다. 지구는 파멸되어 간다. 이제 인류는 회심해야 한다. 인류의 종말을 심각히 고민해야 할 때다. 그러나 우리는 혼돈에 빠져 있다. 이 혼돈의 시대에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묵자의 사랑인지도 모르겠다. “천하 만민을 모두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묵자의 말은 귀감이 된다. 이기주의로 점철된 현대사회에 대한 처방은 오직 이것뿐일 것이다.

묵자는 말했다.
“너에게 천하를 주겠으니 그 대신 네 목숨을 바치라고 하면 그렇게 하겠느냐? 반드시 하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천하가 아무리 귀하다 해도 목숨보다는 귀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말 한 마디로 서로 죽이기도 한다. 이는 의義가 목숨보다도 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사는 의보다 귀한 것이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저마다 옳다고 하니 그 의라는 것이 혼란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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