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remium Only Content
정조와 철인정치의시대2, 이덕일, 문체반정, 천주교, 좌의정, 체제공, 홍낙안, 이단, 공자, 맹자, 사설, 천장, 화성, 장용외영, 영남만인소, 금등지사, 사직상소,금난전권,경연
목차
11장 문체반정
명말 청초 문집을 성토하다 | 문체반정의 시작
박지원과 순정지문(純正之文)
12장 채제공과 금등지사의 비밀
도산서원에서 치른 별시 | 목이 메어 식사를 폐한 것은
노론은 경종에게 신하의 의리가 없다 | 영남만인소
정조의 고민 | 채제공의 사직상소 | 어제 금등지사의 등장
13장 화성의 꿈
숙원 사업의 시작 | 천장(遷葬)
설계도 구비와 장용외영의 설치 | 순조로운 준비
14장 미래로 나아가다
역사적인 해의 시작 | 화성 건설의 원칙 | 만석거와 대유둔
금난전권의 폐지 | 화성에 상가를 조성하라 | 미래 지향의 도시, 화성
15장 임금의 가족들
기구한 운명의 형제 | 정조의 타협안 | 은언군을 다시 만나다
할머니 정순왕후와 어머니 혜경궁 | 부인 효의왕후
16장 철인군주의 하루
독서 군주 | 검소함은 왕가의 전통 | 경연, 『대학』의 의미는 무엇인가?
신민(新民)인가, 친민(親民)인가? | 군사(君師) | 과거 출제관
답안지를 둘러싼 소동 | 사형수를 심리하다
17장 오회연교와 의문의 죽음
주문모 잠입하다 | 오회연교 | 운명의 연훈방
18장 반동
어의의 처벌을 둘러싼 논란 | 시신이 식기도 전에 | 장현경의 딸들
부록 정조어록
찾아보기
책 속으로
이날 아침 정조는 오랜 계획을 말할 때가 되었다고 생각했다. “소자 임금 자리를 탐해서가 아니라 나라를 위해서 마지못해 임금 자리에 있었는데, 갑자년(1804)이면 왕세자가 15세가 되니 족히 임금 자리를 전할 수 있을 것입니다.” 혜경궁은 귀를 의심했다. 갑자년에 왕위를 내놓고 물러나겠다는 소리였기 때문이다. 혜경궁은 정조가 말 한마디 거동 하나 생각 없이 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때 마마(혜경궁)를 모시고 화성으로 가서 평생에 사도세자께 자식으로서 하지 못한 통한을 이루어 낼 것입니다.” 정조의 입에서 나온 ‘사도세자’란 말이 혜경궁의 가슴에 와 박혔다. 그런 혜경궁의 속내를 아는지 모르는지 정조는 계속 말을 이었다. “내가 선왕의 하교를 받아 이 일을 이루어 내지 못하는 것이 지극히 원통하나 이것 또한 의리요, 왕세자가 나의 부탁을 받아 내 소원을 이루어 내어, 내가 못한 일을 내 대신 행하는 것도 또한 의리입니다.” 드디어 정조의 눈에서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2권 160-161쪽)
정조 18년(1794) 정월부터 시작된 화성 축성은 원래 10년 기한이었다. 그러나 정조의 예상대로 기한은 단축되어 불과 3년 만인 정조 20년(1796) 10월 낙성식을 할 수 있었다.
강제 부역이 아니라 도급제 임금 노동을 실시함으로써 노동 효율성이 크게 높아진 것도 큰 몫을 했다. 강제 부역 때는 마지못해 시간만 때우던 백성들이 도급제 임금 노동을 실시하자 밤낮을 가리지 않고 열심히 일했다. 정약용이 설계한 기중가(起重架)를 사용해 ‘4만 냥(兩)의 비용을 절약했다’고 정조가 기뻐한 것처럼 첨단 과학지식과 장비가 모두 동원된 것도 조기 준공에 큰 몫을 했다.
정조는 조선 사회 밑바닥에서 꿈틀대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을 읽고 있었다. 사대부들이 사변적인 말장난으로 세월을 보내는 동안 사회 밑바닥에서는 거대한 변화의 흐름이 일고 있었다. 농업생산력 발전에서 시작된 변화는 수공업과 상업으로 옮겨 가 사회 전체에 파급되었다. 정조는 화성이 사회의 이런 변화를 흡수할 뿐 아니라 선도하는 도시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정조의 죽음과 동시에 조선은 미래에서 과거로, 개방에서 폐쇄로, 소통에서 단절로, 사랑에서 증오로 돌아섰다. 그것은 죽음으로 가는 길이었다. 그랬다. 1800년 6월 28일, 그의 죽음과 함께 조선은 죽음의 길로 접어들었다.
이 때문에 정조는 오늘 다시 살아나야 한다. 이 시대가 미래에 대한 통찰력이 있는 지도자를 갈구하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런 갈구는 언제나 크지 않았는가. 보다 중요한 것은 그가 꾸었던 꿈이 우리가 걸어야 할 길이기 때문이다. 과거가 아니라 미래, 증오가 아니라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열려고 했던 그의 미래가 우리의 내일이어야 하기 때문이다. (서문에서) 닫기
출판사 서평
학자군주이자 무인군주로서 군사(君師)가 되고,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힘으로써 만인의 모범이고자 했던 임금 정조의 일과와 곁에 있던 사람들, 미래에의 꿈과 갑자년 구상까지.
역사가 이덕일이 오랜 시간에 걸쳐 연구․해석한 철인군주 정조의 희망과 좌절, 성공과 회한, 도전과 꿈의 역사
18가지 주제 아래 정조 시대를 서술해 나간 이 책은『정조실록』,『일성록』,『홍재전서』 등의 관찬사서뿐 아니라 채제공의『번암집』, 정약용의 문집, 이덕무의『청장관전서』, 박제가의『정유집』, 유득공의『고운당필기』 등 개인 문집을 망라하여 역사의 진실에 최대한 다가서려 노력하였다. 1차 사료에 충실하면서 뛰어난 이야기 구성으로 읽는 재미를 배가시키는 역사학자 이덕일의 이 책을 통해 철인군주 정조가 오늘 우리에게 지니는 의미를 생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임금 자리에 오른 정조의 두 가지 모순
정조는 즉위 일성으로 “과인은 사도세자의 아들”임을 천명하였다. 그러나 이후 사도세자와 관련하여 눈에 띄는 행보를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사도세자에 대한 의리를 되새기라는 소론 측의 상소에 크게 화를 내며 상소를 올린 이들을 사형시킨다. 사도세자 문제에 대해서는 “차마 들을 수 없고, 차마 보지 못하며, 차마 말할 수 없다”는 할아버지 영조의 ‘3불유훈’을 어기는 것은 불효로 귀결되고, 이는 반대세력에게 쿠데타의 명분이 될 수 있었다. 할아버지의 유훈을 받들자니 아버지의 원혼이 울고, 아버지의 원수를 갚자니 할아버지의 뜻을 어기는 불효손이 되는 모순된 상황에서 정조가 찾은 해법은 경에서 '권도(權’道)' 즉 편법을 찾는 것이었다. 사도세자를 직접 거론하지 않고 사건 당사자들을 다른 명목으로 처벌함으로써 아버지의 원수도 갚고 할아버지의 유명도 거역하지 않는 권도를 택한 것이다.
갑자년 구상―아들에게 양위하고 화성에서 사도세자의 아들로 살겠다.
정조는 나이 쉰셋이 되는 갑자년(1804)에 부친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기 위해 세자(훗날의 순조)에게 왕위를 물려주고 수원 화성으로 가 여생을 보내겠다는 계획을 세운다. 세자가 국왕이 되어 할아버지 사도세자를 국왕으로 추숭하는 것이 정조가 영조의 유훈을 어기지 않고 부친에게 효도를 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철인 군주의 하루―최고의 학자이자 뛰어난 무관으로 군사(君師)가 되다.
정조는 가슴속의 증오와 분노, 갈등을 다스리기 위해 스스로에게 조금의 여유와 틈도 허락하지 않았다. 세손 시절 그는 시강원의 스승인 빈객에게 준 글에서 “나는 천하만사가 모두 하나의 ‘나(懶:: 게으름)’ 자로부터 무너진다고 생각합니다”라고 했다. 그렇게 그는 단 한순간의 나태도 용납하지 않으며 자신을 다그쳤다. 이는 정심(正心)의 추구였다. 『대학(大學)』의 정심은 마음에 노함이 있으면 얻을 수 없는 수양 단계이기 때문에, 그는 매일같이 정심을 되뇌는 것으로 분노와 증오를 다스려야 했다. 그 과정이 그를 철인(哲人)으로 만들었다. 가슴속의 분노와 증오, 그리고 부친의 원수들과 매일같이 머리를 맞대야 하는 고통을 정심으로 극복했던 것이다. 활을 쏘며 그는 “정심을 하지 못하면 과녁을 맞히지 못한다. 아무리 어리석은 사람이라도 과녁을 맞힐 때는 정심이 되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에게는 학문과 정사와 활쏘기가 모두 하나였다. 그렇게 그는 철인 정치가가 되어 갔다.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함을 밝히는 것이 우리 왕가의 법도이다”라고 밝힌 정조에게 중요한 것은 천하를 편하게 다스리는 평치이고 학문의 완성이었다. 정조는 경연 자리를 자신이 신하들의 스승이 되는 계기로 활용했다. 임금이 모든 신하의 스승이라는 군사론(君師論)의 탄생이었다. 정조가 과거 시험 문제를 직접 출제하고, 초계문신들을 가르치고, 경연에서 스승 역할을 하는 모든 것들이 이 군사론에서 나왔다.
정조가 만난 사람들
철인군주 정조가 자신의 과거를 딛고 미래를 향해 걸었던 길에는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순왕후와 노론은 결코 미래로 갈 수 없다며 정조의 발목을 잡았다. 송시열의 후손 송덕상과 그를 추대한 사람들도 마찬가지였다. 때로는 홍국영처럼 미래를 가장해 과거를 걷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그러나 그 길에는 또한 천주교를 받아들였던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 형제 같은 남인들과 사회의 천시 속에서도 최고의 실력을 쌓았던 이덕무, 박제가, 유득공 같은 서얼들, 그리고 사도세자의 이장(移葬)에 눈물을 흘리던 백성들이 있었다. 이들과 함께 정조는 미래를 향해 걸었다. 그 길의 끝에는 새로운 세상이 있었다. 정조에 의해 발탁된 서얼 출신의 규장각 사검서(四檢書)들이 단번에 조선의 지식계를 평정한 것처럼 조선은 새롭게 바뀌어 갔다.
채제공과 ‘금등지사’의 비밀―왕도 울고 신하들도 모두 울었다.
채제공을 처벌해야만 하는 입장이 된 정조는 대신들에게 선왕 영조의 ‘금등지사(金縢之詞)’를 공개하며 채제공을 두둔한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후 도승지로 있던 채제공에게 자신이 직접 쓴 글 한 통을 주면서 신위 아래에 간수하라고 명했는데, 그 ‘금등’의 글 가운데 있는 한 구절을 채제공이 사직상소에서 언급한 것이고 이는 선왕과 자신에 대한 충성과 의리에서 나온 것이니 죄를 물을 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영조가 손수 적은 ‘금등지사’ 가운데 정조가 공개한 두 구절에는 사도세자가 살아 돌아오기를 바라는 영조의 마음이 담겨 있었다.
오회연교와 죽음
다시 불붙은 천주교 논쟁으로 남인들이 위기에 몰린 상황에서 정조는 재위 24년(1800) 5월 30일 ‘오회연교’를 통해 중대한 결심을 시사한다. 주요 내용 중 하나는 ‘모년의 의리’ 즉 사도세자와 관련한 내용이었고 또 하나는 정계에서 밀려났던 남인들을 다시 중용하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며칠 후부터 정조는 심상치 않은 병세를 보인다. 병석의 정조는 대대적인 정치 개혁을 준비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말을 한다. 노론의 입장에서는 최악의 상황이었다. 6월 23일, 뒤에 크게 논란이 되었던 연훈방(烟熏方) 요법이 의관 심인의 소개로 등장한다. 6월 28일 정조는 정순왕후와 단둘이 있는 상황에서 숨을 거둔다.
-
2:00:56
Game On!
17 hours ago $8.09 earnedNFL Experts debate if Joe Burrow will make HISTORY in Week 18!
83.5K8 -
2:07:57
InfiniteWaters(DivingDeep)
4 days agoHOW TO ENTER 2025 LIKE A BOSS!
13.2K1 -
15:43
Tactical Advisor
3 hours agoBEST and WORST Guns Of 2024
15.3K4 -
9:14
Dermatologist Dr. Dustin Portela
3 hours ago $0.54 earnedProducts a Dermatologist Actually Uses
15.3K9 -
20:54
inspirePlay
5 hours ago $2.85 earned🏌️♀️ Extreme Knockout Golf Challenge Part 2 – Do the GIRLS beat the BOYS? 🏌️
38.5K2 -
24:09
Squaring The Circle, A Randall Carlson Podcast
4 hours ago#033 At The Crossroads - Squaring the Circle: A Randall Carlson Podcast
19.4K10 -
50:17
BIG NEM
4 days agoBrian Herzog: From Zero to 150 MILLION Views in a Year 🚀
16.9K1 -
2:48:35
FreshandFit
17 hours agoHenny Chris VIOLATES 5 Girls 🤣
198K159 -
6:33:57
AdmiralSmoothrod
19 hours agoescape from tarkov - the best and brightest - party games later?
142K13 -
59:15
RealitySurvival
20 hours agoMore in coming Chaos? War With China? Trumo Tower Bombing & Bourbon Street Massacre
8.08K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