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속의 의학, 서울대학교병원 의학역사문화원, 삶의 부조리, 페스트, 알베르까뮈, 맞서 맹렬히 저항하는 의사, 근사체험, 제중원, 드라마, near death experience

3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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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를 위해 예술과 의학, 두 문화가 만나다
예술과 의학은 일견 매우 이질적인 분야로 보이지만 두 분야의 접점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곳에서 찾을 수 있다. 예술과 의학은 모두 인간의 의미, 삶과 죽음의 의미를 끊임없이 묻게 만들곤 한다. 또한 두 분야 모두 궁극적으로는 인간이 어떻게 하면 더 행복하게 잘살 수 있을까 하는 꿈과 열망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의학과 예술의 접점을 따라가다 보면 의학과 예술의 근본에 깔린 질문들을 다시 돌아보고, 궁극적으로는 인간 자신을 대면하기에 이른다. 그런 점에서 많은 의료인들이 예술에 조예가 깊었고, 또 많은 예술가들이 의학 지식에서 영감을 얻었던 것은 우연만은 아닐 것이다.
이 책은 의학과 문학, 의학과 시각예술, 의학과 음악, 의학과 영상예술 등 다양한 영역에서 의학과 예술이 주고받은 영향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책을 여는 글은 이부영 교수의 ‘예술과 의술 - 치유의 기능을 중심으로’이다. 책 전체의 문제의식을 관통하는 이 글에서 이부영 교수는 동서양의 폭넓은 사례를 통해 고대 문명에서는 예술, 의술, 종교가 모두 넓은 의미의 치유(healing)를 지향하며 이 세 가지 분야 사이에 경계가 없었음을 보여준다. 이후 근대 의학의 발달로 예술과 의술의 간격이 넓어졌으나 다시금 예술, 의술, 종교의 전체성을 회복하는 것이 중요한 과제가 되고 있음을 동서고금의 예술작품과 현대의 예술 치료 등의 사례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이 교수는 덧붙여 진정한 예술과 의학의 만남을 위해서는 예술을 치유를 위한 기술로 이용하는 것을 넘어서 예술 고유의 가치를 존중하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을 역설하고 있다.
제1부에는 의학과 문학의 관계를 다룬 두 편의 글이 실려 있다. 필자 김애양 원장은 ‘명작 소설 속의 의사 이야기’에서 문학작품 속에 의사라는 직업이 어떻게 그려지고 있는지 추적한다. 문학작품 속에서 의사들은 때로는 진리를 탐구하고 생명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투사의 모습으로 묘사되기도 하고, 시대의 부조리와 맞서 싸우는 고독한 개인으로 묘사되기도 하며, 때로는 타인의 감정을 헤아리는 데 서툰 기능적 지식인으로 부정적으로 묘사되기도 했다. 이러한 다양한 모습은 결국 의사도 인간이기 때문에 빚어지는 것이므로, 의사 또한 인간을 이해하는 데 더 많은 노력을 기울여야 할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어지는 글은 이수형 교수의 ‘근대소설 성립기에 나타난 마음과 신경의 병’이다. 이 글은 근대의학이 도입되던 시기 ‘신경’이라는 최신 지식이 당대의 한국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졌으며, 이것이 다시 그들이 인간을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 교수는 이광수의《무정》을 예로 들어 우리나라 근대문학의 성립기에 ‘정(情)’이 개인의 개별성과 주체성의 표지로 중요하게 받아들여졌음을 보여준다. 그리고 김동인과 염상섭의 작품들을 통해 당시로서는 최신 의학지식이었던 신경생리학이 문인들이 ‘마음’을 이해하는 데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살펴본다.
제2부는 의학과 시각예술의 관계를 다룬다. 성명훈 교수는 ‘아스클레피우스의 지팡이와 히포크라테스 선서’에서 의료인들에게 가장 친숙한 두 가지 표상의 역사를 미술사와 문헌학에 기반하여 추적하고 있다. 성 교수는 뱀이 감겨 있는 지팡이가 어떻게 의사의 상징이 되었는지, 그리스 신화의 아스클레피우스 전설에서 출발하여 오늘날의 각종 그림에 이르는 다양한 자료를 통해 보여주고 있다.
김상태 교수는 ‘사진으로 한국 근대 의료사를 읽다’에서 스물넉 장의 도판을 통해 한국 근대 의료의 변천사를 보여주고 있다. 종두법의 보급, 제중원의 설립, 한반도에 상륙한 일본 군진의료와 구미의 선교의료, 대한의원의 설립, 시련을 딛고 성장하는 한국인 의료 인력, 여성의 의료계 진출, 일제강점기 성행했던 전염병을 둘러싼 생활의 단면 등 근대 의료사의 여러 단면들이 사진을 통해 생생하게 펼쳐진다. 김 교수는 이들 사진 속에서 1880년경 첫발을 내디딘 한국의 근대 의료가 얼마나 많은 역경과 난관을 거치면서 오늘에 이르렀는지 확인할 수 있게 한다.
이어지는 글은 정태섭 교수의 ‘X-ray Art의 이해’이다. 정 교수의 작업은 예술과 의학의 관계를 제삼자의 입장에서 평론한 것이 아니라 직접 창작 활동을 통해 하나로 묶어냈다는 점에서 특이하다. 정 교수는 영상의학과 교수이면서 동시에 자신의 전공을 이용하여 X-ray 아트라는 독특한 장르를 개척하여 활발한 작품활동을 펼치고 있다. 정 교수는 자신이 이 새로운 세계에 발을 들이게 된 경위를 설명하고 자신의 X-ray 아트 작품과 그것이 어떻게 수용되고 있는지 소개하고 있다. 이어서 자신의 창작 작업이 갖는 의의를 ‘물체의 내부 구조를 표현할 수 있는 새로운 빛에 의한 예술’인 X-ray 아트의 장래성이라는 관점에서 시사하고 있다.
제3부는 의학과 음악, 영상예술의 관계를 다룬다. 조수철 교수의 ‘베토벤의 삶과 음악세계 - 발달학적 측면’이다. 정신과 의사이면서 베토벤과 바그너의 권위자이기도 한 조 교수는 영혼의 조화와 균형이 지금까지의 의학이 포괄하지 못했던 영역임을 주장하고, 음악이 조화와 균형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치료 또는 치유의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는 점을 역설한다. 조 교수는 특히 베토벤의 삶을 분석함으로써 한 위대한 인간의 삶 속에서 개인적 발달과 음악세계의 확장이 어떻게 교차하여 이루어졌는지 보여주고 있다.
이어지는 정현채 교수의 글은 ‘영화를 통한 현대인의 죽음 이해’이다. 정 교수는 영화가 개인의 성찰과 치유에 적합한 매체이며, 특히 의사의 교육과정에서 임종의 경험은 매우 제한되어 있으므로 영화를 이용하여 죽음의 문제를 간접적으로 성찰하는 것이 교육적으로 유용하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위해 정 교수는 죽음을 다룬 영화들을 소개하고 있는데, 이들 영화가 일관되게 전하는 메시지는 죽음을 흉한 것, 피해야 할 것으로 여기지 말고 그에 대해 터놓고 이야기하며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또한 근사체험(near death experience)을 다룬 영화들과 근사체험에 대한 학술적 논의들을 소개하면서, 근사체험이 단순한 환각이 아니라 본격적으로 탐구할 가치가 있는 주제임을 역설한다.
마지막 글은 주진오 교수의 ‘드라마 제중원이 왜곡한 제중원의 역사’이다. 2010년 상반기 서울방송에서 방영된 드라마 제중원은 대중적으로 상당한 인기를 끌었고, 개항기 의료 현실에 대한 관심을 높이는 데 기여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 교수는 이 드라마가 당시의 역사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상태로 제작되었기 때문에 제중원의 역사를 오히려 왜곡시킬 우려가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주 교수는 드라마의 내용 중 역사적 사실과 다른 것들을 지적하는 데 머물지 않고, 사극의 고증과 재미라는 딜레마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에 대한 견해를 피력하기도 했다.
이 책은 예술과 의학 사이에 있던 잃어버린 고리들을 다시 찾아 연결하는 일련의 작업들을 묶은 것이다. 내면의 갈등과 분리로 힘들어하는 현대인들에게 완전성을 회복하게 하는 치유의 진정한 의미를 이 책을 통해 알 수 있게 될 것이다.

[인터넷 교보문고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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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속으로
고대 사회에서 의사와 사제와 예술가의 직종이 분리된 이후에도 예술과 종교는 의사들과 별 마찰 없이 치료기능을 부분적으로 담당해 왔다. 그러나 의학의 자연과학적 토대가 견고해지면서 19세기 ‘실험실 의학’을 기점으로 의학은 종교와 예술과 멀리 떨어져나갔다. 예술창조의 작업을 응용한 치료기술이 다양하게 소개되고 있지만 생물학적 의료에는 그것이 수용될 자리가 없다. 20세기에 이르러 의학 교육계에서는 지나치게 기계적인 의료의 비인간화를 막기 위해서 인간행동의 심리사회적 측면의 교육을 행동의학 또는 의학개론이라는 형태로 권장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인문의학’이라는 이름으로 교육과정에 도입하기 시작했다. 이로써 예술과 의술 그리고 종교는 다시 고대의 조화로운 협동을 회복하게 될 것인가. 어떻게 협동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인가.
이 글은 그런 몇 가지 물음을 제기하면서 예술과 의술을 치유의 기능을 중심으로 비교·고찰하고자 한다.

2. 치유(healing)란 무엇인가?
‘치유’라고 하면 사람들은 단순히 아픈 것을 낫게 하는 것, 즉 상처를 아물게 하거나 몸과 마음의 불편함을 덜어주어서 건강한 상태를 회복하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다. 건강의 회복이다. 그런데 건강이란 무엇인가? 세계보건기구의 건강 개념은 무척 넓다. 건강이란 병이 있고 없고, 신체구조가 완벽하게 갖추어져 있고 없고와 상관없이 ‘편안한 상태(wellbeing)’이다. 무엇이 어떻게 편안해야 하는 것인가? 신체뿐 아니라 마음이 편안해야 하고, 사회문화권에서 살면서 편안해야 하며, 또한 ‘영적’으로 편안해야 한다. 한마디로 건강이란 ‘생물학적·심리적·사회문화적 그리고 영적 안녕(Bio- psycho- sociocultural and spiritual wellbeing)’이다. 영적이라는 말이 어렵게 들리겠지만 초월적인 것에 대한 관계를 말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면 이러한 총체적인 안녕을 가져다주는 치유란 어떤 것이어야 할까. 당연히 총체적이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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