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자가필요한 시간,천웨이런, 천쉐량, 묵자연표, 정나라,삼족,장자,열어구,추백나무열매,천운,노자,공자 ,군주,역경,춘추,우언,고사,치세의군주,두문불출,회남자,요략,극기복례, 까마귀

2 years ago
1

손이양은 묵자가 공자의 제자인 자사와 같은 시기 사람이라고 여겼다. 손이양과 왕중의 관점이 완전히 같진 않지만 기본적으로 일치한다. 사마천의 ‘공자와 동시대 사람’이라는 언급을 부정한 것이다. 『묵자』에는 초 혜왕 당시의 일이 대량으로 기재되어 있다. 혜왕의 재위 기간은 주 경왕 32년(기원전 488년)부터 주 고왕(考王) 9년(기원전 432년)까지인데, 공자는 기원전 479년에 죽었으므로 묵자의 활동 연대는 응당 공자 이후이다. 손이양은 묵자가 공자보다 100년 뒤에 태어났다고 추산했고, 량치차오(梁啓超)는 이보다 약간 빠르다고 생각했다. 량치차오는 묵자가 일찍이 교류했던 사람들에 근거해 묵자의 생몰 연대를 추정했다. --- p.53

양이(楊義)의 『묵자환원(墨子還原)』에 따르면, 묵자의 학문 탐구는 ‘유가를 가까이하다가 유가에서 벗어나는 과정’이었다. 또한 사상 흐름의 과정에서 ‘묵자식 S형’이 출현했다. 묵자는 유자와 교유하며 천민에서 사로 상승하는 과도기를 실현했고, 유자와 논쟁하며 유가를 벗어나 묵가로 돌아오는 전환점을 실현했다. 이상에서 묵가는 유가 학설을 학습해 환골탈태를 이루었고, 더욱이 묵자가 유가 학설에 대한 비판과 반성을 가했음을 알 수 있다. 묵자가 유가를 학습한 과정은 상당히 중요하다. 이를 통해 유가 학설의 진면목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이런 학습 과정이 없었다면 묵자는 「비유」 편처럼 날카롭고 핵심을 찌르는 글을 쓸 수 없었을 것이다. --- p.106

『묵자』 「대취」에서는 “성인은 자식을 위한 일을 하지 않는다”라 했고, 「비명하」에서는 “국가와 백성 인민의 이로움”을 말했으며, 「비악상」에서는 “백성의 의식과 재물을 침탈하는 일을 인자는 하지 않는다”고 했다. 묵자는 소생산자 출신으로 소생산자의 이익을 대표했지만 그것이 꼭 소생산자 범주에 그친 것은 아니다. 수많은 사상가들이 그들의 출신과 전혀 관련이 없었다. 톨스토이, 루소, 사르트르 등이 그랬다. 이 사상가들은 자신의 출신 한계를 뛰어넘어 그들이 처한 시대를 초월하는 이념과 사상을 창조해냈다. 후인들은 『묵자』의 수많은 논설로부터 묵자가 이미 사적 이익 관념의 울타리에서 벗어나 공적 이익 관념의 경지에 깊이 들어갔음을 분명히 알 수 있다. 묵자의 ‘교상리’ 안에는 자기를 버리고 남을 위하는 희생정신이 함축되어 있다. --- p.159

궈모뤄는 『십비판서』 ?공묵의 비판?에서 묵자의 절용관에 대해 격렬하게 비판했다. “한 나라의 정치가 정말로 백성의 이익을 위해 돌아간다면 다만 비용이 충분하지 못한 것을 걱정해야 한다. 거기에 왜 낭비를 우려하는가? 그가 낭비를 우려한 까닭은 단지 왕의 이익을 위한 것이지 백성의 이익 때문이 아니며, 어떻게 백성들이 좀 더 풍족하게 쓸 수 있는지에 대해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다. 다만 그는 인민의 생활을 지극히 검소한 단계로 제한하고, 모든 도구는 “백성의 쓰임새에 충분히 공급할 정도에서 그친다”고 하여 그들이 얼어 죽지 않고 굶어 죽지 않기만을 바랐다.“ (…) (이에 대해) 천쉐량은 『묵자답객문』에서 묵자의 입을 빌려 상술한 관점에 대해 반박했다. “백성을 고단하게 부리고 세금을 무겁게 거둬 백성의 재물이 부족해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자가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이고, 왕공대인이 군사를 일으켜 이웃 나라를 침략해 길게는 일 년 내내 짧게는 몇 달 동안 남녀가 서로 만나지 못하며, 거처가 불안하고 음식을 제때 먹지 못해 병에 걸려 죽는 자가 속출하고 침략 전쟁에서 포로가 되고 공성(攻城)과 야전에서 죽는 자가 부지기수였다.”(?절용상?) 이런 갖가지 것들 때문에 근심하고 걱정하는데, 설마 ‘개인적인 근심’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이는 마땅히 ‘사회 전체의 걱정’이자 수천 수백만 인민의 우환과 재난이다. --- p.207-210

묵자는 현실주의자이자 실용주의자에 가깝다. 묵자의 모든 견해는 현실에서 출발해 하나의 원칙을 견지했다. 바로 사람에게 이로우면 행하고 사람에게 이롭지 않으면 그만둔다는 것이다. 『묵자』 「노문」 편에서는 “나라가 음악과 술에 깊이 빠져 있으면 ‘비악’을 말한다”고 분명하게 말했다. 당시 왕공대인들이 음탕함에 빠져 스스로 공덕 찬양하기를 좋아하고 노래와 춤을 즐기는 무대 건설에 주력해 백성의 인력과 재물을 낭비했기 때문에 주린 자가 먹지 못하고 헐벗은 자가 입지 못하며 피곤한 자가 쉬지 못하는 상황을 초래했다. 묵자는 이런 현실을 겨냥해 ‘비악’을 제시한 것이다.--- p.236

저자 천웨이런은 중국에서 명성을 떨치고 있는 뛰어난 문학가로서, 묵자를 정확하게 고증해 좀더 많은 사람이 묵자를 접하고 이해할 수 있도록 이 책을 저술했다.
[제3부 묵자가 이룬 성취와 과업의 의미]에서는 논리학자이자 과학자로서의 묵자를 조망하고 묵가가 이룬 성취 및 업적에 대해 다룬다. 중국과학사의 권위자인 조지프 니덤(Joseph Needham)이 『묵자』를 읽고 감동해 중국과학사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일화는 유명하다. 저자는 “니덤은 묵가가 고대 과학기술사에서 이룩한 위대한 업적에 경탄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여러 세기를 앞선 묵가의 과학기술 사상이 왜 서양처럼

장장 2000여 년의 중국 역사에서 과학기술 관련 저술은 예상 외로 아주 적었다. 이런 상황에서 『묵경』이 나왔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없는 중국 과학기술사의 기적이다. 『묵경』의 출간 연대는 고대그리스 유클리드의 『기하학원론』보다 약간 빠르지만 그 내용은 훨씬 더 풍부하다. 『묵경』은 ?경상? ?경하? ?경설상? ?경설하? 네 편으로 이루어졌다. ?경상?의 각 조목은 대부분 원리와 정의이고, ?경하?는 논제를 세워 논증한 것이며, ?경설? 상하는 ?경?에 대한 상세한 해석과 논술이다. 위진 시대의 노승이 『묵자』를 주석하고 처음으로 ?경? 상하와 ?경설? 상하 네 편을 따로 묶어, 묵자의 과학적 성과를 망라하고 묵자의 과학 사상, 과학 이론, 과학 방법, 기술 실천을 하나의 과학 체계로 구성했다. (386쪽)

이 책에서는 묵자의 다양한 과학적 성취를 상세하게 다룬다. 우주의 공간과 시간 개념을 비롯해 파동과 입자의 ‘우주기원론’, 해와 달의 항성 위치에 대한 역행 운동 등의 천문학 분야를 비롯해 십진법의 자릿수 개념, 0의 발견, 원의 개념, 대칭과 중심의 개념 등의 수학 분야, 역학과 광학, 음향학 등이 포함돼 있는 물리학 분야에 대해서도 살펴본다. 알려진 대로 묵자는 상당한 과학적 지식을 지녔으며, 연노차(連弩車)를 비롯해 상당수의 무기를 개발했다. 그러나 그가 발명한 무기는 공격용이 아니라 방어용이었다. 뿐만 아니라 지렛대의 원리를 이용하고 사진기의 원리를 최초로 밝혀내기도 했다.
아울러 ‘세계 삼대 논리학의 선구자’로 평가받는 묵가의 논리학에 대해서도 상세하게 살펴볼 수 있다. 저자는 량치차오에 의거해 묵자의 논리학에 대해 이렇게 설명한다.

량치차오는 묵가 논리학이 세계 논리학사에서 중요한 지위와 과학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고 단언했다. 그는 묵가 논리학이 고대 그리스의 아리스토텔레스나 영국의 베이컨과 밀, 인도의 학설과 유사하다고 여겼다. 그는 ‘이명거실(以名?實)’ ‘이사서의(以辭抒意)’ ‘이설출고(以說出故)’를 각각 서양 논리학의 개념, 판단, 추론의 세 가지 사유 방식으로 해석했다. (…) 『묵경』의 연역 논증 방식은 대부분 인명학의 삼지나 아리스토텔레스의 삼단 논법을 줄인 형식이다.(405쪽)

“지금 묵자를 읽는다는 것은 다음 시대를 준비하는 것이다!”
_ 묵자에게서 인간다운 삶을 위한 새로운 사상의 원형을 보다

얼마 전 타계한 한국 사상계의 거목 신영복 선생은 묵자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묵가는 좌파 사상과 좌파 운동이 그 이후 장구한 역사 속에서 겪어나갈 파란만장한 드라마를 역사의 초기에 미리 보여준 역설적인 선구자였다.” 선생은 그 이유를 다음과 같이 말했다. “그가 전국시대의 패권적 질서와 지배계층의 사상에 대하여 강력한 비판세력으로 등장하여 일반 백성의 이상(理想)을 처음으로 그렸기 때문이다. 묵자는 투철한 신념과 지칠 줄 모르는 열정으로 대중 속에서 설교하고, 검소한 모범을 보였으며 백성의 절대적 지지를 받았다.”
그간 동아시아의 사상적 주류는 공자로 대변되는 유가였다. 유가는 차별이 엄격하고, 예를 중요시하며 행동보다는 철학적 탐구를 권하는 사상이었기에, 권력자들의 환영을 받았다. 반면 권력에 저항하고, 백성의 안정된 삶과 실천을 중요시했던 묵가 사상은 철저하게 금지되어 2000년간이나 복원되지 못했다. 하지만 묵자의 명맥은 끊어지지 않고 우리에게까지 전달되었다. 그 이유는 건강한 공동체, 차별 없는 평등, 전쟁 없는 평화로운 사회를 건설하고자 헌신한 묵자의 사상이 오늘의 우리에게 ‘인간다운 삶을 꾸려나갈 사회’를 만드는 새로운 사상적 원형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대한민국 국민은 ‘촛불’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고 새로운 세상을 이끌어내는 ‘시민의 힘’을 보여주었다. 촛불 이후 1년이 지났지만 아직 우리 사회에는 혁신해야 할 부분이 상당히 많다. 물질적 풍요와 사상적 자유가 실현된 겉모습 뒤로 끊임없는 다툼과 경쟁, 불평등에 내몰리는 현실에서 묵자의 사상은 ‘어떻게 인간다움을 지켜갈 수 있는가’에 대한 빛나는 성찰을 안겨준다. 바로 ‘옳은 것을 향해 행동하라’는 것이다. 이제 우리가 묵자의 짚신을 신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행동을 시작해야 할 때다.

추천의 글

“묵자는 큰 마르크스이자, 작은 예수다.” _량치차오

“오늘날 청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은 실천이지 말이 아니다. 그 실천이 바로 묵자다.” _루쉰

“묵가는 머리끝부터 발뒤꿈치까지 모두 닳아 없어진다 해도 천하를 이롭게 한다면 기꺼이 한다.” _맹자

“세상의 가장 유명한 학문은 유가와 묵가이다.” _한비자

“묵자는 당대인들이 가장 사랑했지만, 후대의 권력이 철저히 지운 사상가이다. 묵자는 정의를 추구했지만, 권력은 질서를 원했기 때문이다. 정의가 무너진 시대는 묵자를 다시 소환한다. 민생과 동떨어진 권력이 존재 이유를 잃었을 때 묵자는 다시 불려 나온다. 탐관오리를 혼내주는 협객이 그리울 때 묵자는 또 호출당한다. ‘함께 하는 세상’이 생각날 때 사람들은 묵자에 환호한다. 지금처럼.”
_ 강상구, 『마흔에 읽는 손자병법』 저자

Loading comment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