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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years ag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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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 1994년 1월 31일 ~ )은 블록체인 기반의 암호화폐인 이더리움(ethereum)의 창시자이다. 스마트 계약 기능을 구현했고, 다양한 토큰을 개발할 수 있는 플랫폼을 제공했다. ICO 방식으로 개발 자금을 확보했다. 비탈릭 부테린의 별명은 '외계인'(外界人)이다. 그가 만 19세라는 어린 나이에 이더리움 백서를 쓴 것은 보통 인간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므로, "혹시 우수한 문명을 가진 외계인이 아닐까"라는 뜻으로 사용한다. 특히, 비탈릭 부테린의 외모와 옷차림이 일반인과 달리 상당히 독특하여, 외계인이라는 별명이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의 이름인 '비탈릭'과 비슷한 '비탈길'이라는 별명도 있다. 2018년 1월 19일 미국 포브스가 발표한 전 세계 암호화폐 부자 순위 18위를 기록했다.
비탈릭 부테린(Vitalik Buterin)은 1994년 1월 31일 러시아 모스크바 주 콜롬나에서 태어났다.[1] 비탈릭은 컴퓨터 과학자인 아버지 드미트리 부테린(Dmitry Buterin)과 어머니 나탈리아 아멜린(Natalia Ameline) 사이에서 태어났다.[2]

비탈릭 부테린은 6살 때 부모님의 직장 문제로 러시아를 떠나 캐나다로 이민을 갔다. 그는 10살 때부터 수학, 프로그래밍, 경제학 등에 재능을 보였으며, 3학년에는 영재반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는 게임을 만들기 위해 코딩을 독학하고, 러시아어·중국어·영어 등 5개 국어 구사하는 등 천재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3] 또한 또래 아이들보다 두 배 정도 빠른 속도로 세 자리 숫자를 머릿속에서 연산할 수 있었다. 2011년 그는 시뮬레이션 로봇을 가지고 싸우는 고등학교 프로그래밍 대회에 참가하여 3위를 차지했다. 이 대회에서 비탈릭은 다른 사람들과 다르게 중앙 명령 통제 중심의 전략을 쓰지 않았고, 그 대신 로봇 부품에 유틸리티 기능을 주고 스스로 목적을 최대화하기 위해 독립적으로 행동하게 만들었다.[2] 2012년에는 전 세계 80개국에서 300명의 소프트웨어 개발자들이 참여하여 알고리즘 문제 풀이 및 코딩 실력을 겨루는 국제 정보 올림피아드(IOI) 대회에 캐나다 대표로 참가하여 동메달을 획득했다.[4]

비트코인 작가

비트코인매거진(Bitcoin Magazine)
어릴 때부터 수학과 프로그래밍에 특별한 재능을 보인 비탈릭 부테린은 2007년부터 2010년까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WOW) 게임에 빠져 있었다. 어느 날 게임 제작사인 블리자드는 비탈릭이 아끼던 캐릭터의 기능을 없애버렸고, 중앙집권적 서비스의 문제점을 깨달은 그는 게임을 중단했다. 게임을 그만둔 그는 새로운 삶의 목적을 찾다가 2011년 2월 아버지로부터 암호화폐 비트코인에 대해 처음 듣게 되었다.[5] 그는 비트코인에 매력을 느껴 비트코인에 대해 공부를 하였고 암호화폐 커뮤니티에 처음 소개되었다.

마침 《비트코인 위클리》(Bitcoin Weekly)라는 블로그 개설자가 5 비트코인을 주며 글을 써달라고 비탈릭에게 제안했다.[6] 시간당 $1.5의 임금을 받으며 글을 쓰던 비탈릭 부테린은 2011년 9월 비트코인 사업자인 미하이 알리지에(Mihai Alisie)의 제안을 받아 함께 《비트코인 매거진》(Bitcoin Magazine)을 공동 설립했다.[7] 이후 그는 이 잡지에 암호화폐에 대한 기고 글을 쓰기 시작하였고 그의 월급은 오로지 비트코인으로만 지급되었다.[8] 비트코인 매거진 사이트에는 비탈릭 부테린이 2012년 2월부터 쓴 글들이 게시되어 있다. 비트코인 매거진은 이후 2015년에 BTC 미디어에서 인수하였다.[9]

여러 암호화폐 연구
2013년 비탈릭 부테린은 컴퓨터 과학을 공부하기 위해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University of Waterloo)에 입학했다. 하지만, 그는 학업에 열중하기보다는 학교를 다니면서 암호화폐, 벤처 등에 꾸준히 관심을 가지면서 서적을 찾아보거나 글을 썼다. 2013년 비트코인 가격이 급등하며 관련된 주제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높아지자, 비탈릭 부테린은 암호화폐 관련 개발 사업에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컬러드코인
비탈릭 부테린은 알렉스 미즈라히(Alex Mizrahi)의 컬러드코인(Coloredcoin) 프로젝트에 참여하여, 자산 및 계약에 대한 정보를 비트코인 블록체인 속에 넣기 위한 초기 블록체인 2.0 구성 개발 작업을 수행하였다. 컬러드코인이란 비트코인 블록체인을 통해 현물 자산을 디지털 형태로 표현하는 자산 발행 레이어로서, 오픈 애셋 프로토콜(open asset protocol)이라고도 불린다.[10] 비탈릭 부테린은 미국 캘리포니아 주에서 열린 비트코인 컨퍼런스에 참석하여 크립토(crypto) 커뮤니티의 활발함을 느꼈다.
마스터코인
비탈릭 부테린은 세계 최초로 ICO를 실시한 마스터코인에 대해 연구했다. 마스터코인(Mastercoin)은 2012년 제이 알 윌렛(J. R. Willett)이 제안한 암호화폐로서, 다른 여러 디앱(DApp)들이 작동할 수 있게 하는 플랫폼 코인이었다.[11] 비탈릭 부테린은 이스라엘로 가서 다니엘 팔라드(Daniel Palad)에 의해 마스터코인 관계자들을 소개받았다. 그는 이 때 마스터코인과 같은 비트코인 플랫폼 상의 세컨드 레이어(second layer)를 만들 수 있는지, 어떤 혁신이 일어나고 있는지를 직접 확인할 수 있었다. 이 작업으로 그는 비트코인 블록체인의 범위가 제한되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12]
이더리움 창시

이더리움(Ethereum)

이더리움재단(Ethereum Foundation)

찰스 호스킨슨(Charles Hoskinson)

조셉 루빈(Joseph Lubin)
비탈릭 부테린은 블록체인이 화폐의 기능을 뛰어넘어 더 넓은 분야로 확장될 수 있다고 믿고 자신이 직접 개발하기로 결심하였다. 그는 처음에 비트코인 커뮤니티 내부에서 기존 비트코인 시스템을 개선하기 위해 여러 차례 제안을 했으나 번번이 거절당했다. 비트코인 소스를 개선하려면 기존 개발팀의 동의를 얻어야 하는데, 비트코인 커뮤니티 구성원 중 상당수가 비트코인을 금융 부문 외에 사용하는 것을 굉장히 꺼려했다. 결국 비탈릭 부테린은 비트코인이 아닌 새로운 독립적인 블록체인 플랫폼을 만들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이더리움 백서 작성
2013년 비탈릭 부테린은 캐나다 토론토에서 "차세대 스마트 계약과 탈중앙 애플리케이션 플랫폼"이라는 제목의 이더리움 백서를 발간했다.[13] 그는 이 백서에서 탈중앙 분산 응용 프로그램인 디앱(DApp)을 만들기 위한 새로운 오픈 소스 기반 블록체인 플랫폼의 개념을 정립하였다. 이더리움은 튜링완전(Turing-complete) 프로그래밍 언어가 내장된 블록체인으로서, 개발자가 어떠한 종류의 응용 프로그램도 자유롭게 작성할 수 있다. 또한 네트워크 안에서 이더(Ether)가 어플리케이션을 구현하기 위한 연료(gas)로 사용되어, 전기와 같은 실질적 가치를 내포하였다. 이더리움은 비트코인의 한계에 대한 비탈릭 부테린의 생각을 집대성한 결과물로서, 혁신적인 결제 네트워크이자 신종 암호화폐이다. 이더리움은 탈중앙화 결제 네트워크를 표방하는 비트코인과 달리, 다양한 어플리케이션을 구동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반 디앱 플랫폼이다.[14]

이더리움재단 설립 및 ICO
2014년 비탈릭 부테린은 캐나다 워털루 대학교를 중퇴하고, 찰스 호스킨슨(Charles Hoskinson), 미하이 알리지에, 앤써니 디 이오리오(Anthony Di Iorio) 등과 함께 이더리움재단(Ethereum Foundation)을 공동 설립했다. 또한 개발자 개빈 우드(Gavin Wood)와 조셉 루빈(Joseph Lubin)을 영입하였다. 2014년 8월 그는 "개발자들에게 암호학적으로 안전하고, 탈중앙화된 소프트웨어 개발을 지원하는 월드 컴퓨터가 되겠다."는 원대한 비전을 제시했다. 이더리움 재단은 이더리움 플랫폼 개발 자금을 모으기 위해 크라우드펀딩 방식인 ICO를 진행하여, 약 3만 비트코인을 모았다. 3만 비트코인은 당시로는 파격적으로 큰 투자금액이었으며, 2014년 이전에 진행된 모든 ICO 가운데 가장 큰 금액이었다. ICO로 막대한 투자 자금을 모으는데 성공하여, 이더리움 개발 프로젝트는 재무적으로 안정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다.

공동 창업자들의 갈등
이더리움 초기 개발 당시 공동 창업자가 모두 8명으로서, 크게 비즈니스를 담당하는 사람들과 기술을 담담하는 개발자들로 그룹이 나뉘었다. 찰스 호스킨슨, 조셉 루빈, 미하이 알리지에 등 비즈니스 그룹은 암호화폐를 어떻게 발행·유통하고 ICO를 어떻게 진행할지와 같은 토큰 이코노미에 대한 관심이 많았다. 반대로 비탈릭 부테린, 개빈 우드, 제프리 빌케(Jeffrey Wilcke) 등 개발자들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어떻게 개발할지에 대한 관심이 더 많았다. 이더리움 사업 초기에는 어느 한쪽의 주장이 강하지 않았고, 당시 이더리움 CEO인 찰스 호스킨슨 하에 조율이 잘 되었다. 하지만 이더리움 프로젝트가 커지고 유명해지면서 자금 규모가 커지게 되었고 모두의 주장이 강해지기 시작했다. 비즈니스 그룹과 개발자 그룹의 갈등이 점점 심해지면서, 개발자들은 "비즈니스 사람들은 아무런 가치를 창출하지 못하니 쫓아내야 한다"고 말했고, 반대로 비즈니스 사람들은 "개발자들은 평생 제대로 된 제품을 만들어내지 못할 거야"라고 말하였다. 이 두 그룹은 극명하게 대립했고, 결국 이더리움 프로젝트가 앞으로 구글 같은 영리 기업이 될지, 아니면 모질라재단 같은 비영리 기업이 될지 선택하는 투표를 가졌다. 처음에 비탈릭 부테린은 이더리움이 영리 기업이 되는 것에 투표를 했지만 온전히 동의를 하지 못했다. 결국 창업자 8명이 모두 스위스에 다시 모여 토론한 결과 비영리 기업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이 과정에서 찰스 호스킨슨, 앤써니 디 이오리오 등 비즈니스 그룹 사람들은 차례로 이더리움을 떠났고, 이더리움은 개발자 중심의 프로젝트로 바뀌었다.
http://wiki.hash.kr/index.php/%EB%B9%84%ED%83%88%EB%A6%AD_%EB%B6%80%ED%85%8C%EB%A6%B0
출처 해시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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